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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Jan 18. 2018

애틋하게 만날거야.

수신확인을 할 수 없다 해도.


무작정 가게 되던 길이 있다. 그저 그곳에 나와있기만을 바라면서 약속장소로 가던 버스 안, 기차 안의 풍경들을 기억한다. 혹시 나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젯밤에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까. 잔뜩 불안 속에 네가 나오지 못할 이유들을 피워내면서도, 그 연기들을 미세먼지처럼 들이마실 수 밖에 없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나날들을.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헛걸음이라해도 나갈 수밖에 없는 약속들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맘으로 상대에게 보낸 메시지들은 '읽지않음'이거나 '수신확인'이 불가했다. 그냥 움직였다.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곳으로.


6년 전 쯤이었나. 워싱턴DC 메트로센터 역으로 무작정 캐리어를 끌고 플랫폼에 들어선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미국에서 개통한 핸드폰이 없던 너는 어제 '내일 역에서 만나.' 라는 메시지를 끝으로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만 연락이 가능했던 너. 특가항공권이라 꼭 정해진 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움직여야 했던 너. 버지니아에서 어학연수를 가장한 잉여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 지구 반바퀴를 떨어져 있던 우리가 시차없는 공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었다. 라스베거스를 지나 뉴올리언즈를 지나 DC로 오고 있는 너. 고작 차로 두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네가 온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미국에 떨어지고 나서 사귄 친구라고는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사촌동생 두명과, 이모집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 뿐이었으니까. 내년까진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네가 온다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만나지. 막상 버스를 내려 메트로 센터 역으로 옮겨간 나는 초조해졌다. 너는 핸드폰이 없고, 역은 너무나 컸는데. 다섯 개의 노선이 다 지나다니는 규모의 거대한 환승역이었는데. 그날 우리가 예약한 숙소의 주소는 너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못 만나면 나는 어디서 자게 되는 걸까. 내일 모레 또다시 다른 곳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너를 볼 시간이 너무 없는데, 반년 동안 잘 지냈는지.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밤새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냉정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1초만에도 몇백명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이제 어쩌지. 무작정 공항쪽에서 DC 도심을 향해 들어오는 방향의 플랫폼으로 들어선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도 읽지 않는 너. 서러워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다는 게 애초에 무리였나. 어떻게 너랑 내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역에서, 낯선 이들만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만날 수 있어. 산지 얼마되지 않아 낯선 아이팟터치 4세대를 손에 꼭 쥐고 서있을 뿐이었다. 마치 너에게 닿을 수 있는 것처럼.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인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에 든 그 무용지물한 물건을 꼭 쥐어보는 일이었다. 혹시 역에서 못만나면 어딜 가야 와이파이를 잡을 수 있을까. 오늘 안에 만날 수는 있을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 머릿 속에 두서없이 풀어놓고 있을 때 지하철 한 대가 승강장으로 들어섰고, 거짓말처럼 너는 내 앞에 선 열차의 문 안에 서 있었다.


열차의 문이 열리고,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이때의 신기함을 나는 어떻게 해도 설명해낼 수 없을 것 같다. 이 열차가 아니었다면,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돌아 올라가 다른 카페에 들어갔을 것이고, 그러면 너는 나를 또 몇시간 기다렸을 것이고, 기다리다 지쳐 네 이름으로 예약한 숙소에 가서 인터넷에 접속한 후에야 나에게 연락을 했을테고. 만나긴 만났겠지. 해가 지고 배는 고프고 불안한 마음에 하루종일 휩싸여 지친 몸을 이끌고서야 우리는 만날 수 있었겠지.


"3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해. 서울역에서 만나자."고만 말하고서는 만난 셈이다. 어떻게, 내가 무작정 들어선 승강장 문앞으로 네가 올 수가 있어. 그건 서울에 있었어도 불가능한 일인데. LTE도 데이터도 없는 우리가.


그래도 나는 무작정 DC로 가는 버스에 올라 탈 수 밖에 없었고, 우리는 만났다.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갈 수 밖에 없었어.


그런 우연들이 몇 번 있었다. 남미 여행을 할 때에는 각자가 가고 싶은 도시로 흩어졌다가도 SNS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다시 어떤 도시에서 만날지 정하고는 했다.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서로 처음 가보는 곳인데도 버스터미널에서 무작정 기다린다. 대합실에서 자기 몸뚱어리만한 배낭을 다리쿠션삼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기다린다. 역시 와이파이고, 핸드폰이고 없다. 숙소에 들어가서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혹시나 길을 헤매다 출발 버스를 놓쳤다거나, 제대로 탔다해도 중간에 환승이 매끄럽지 않았다거나, 비가 와서 길이 무너졌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통행을 막아놓는다든가, 오만가지 이유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일은 수두룩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만났다.


있을 리가 없어. 열시간을 넘겨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혹시나 하는 맘에 대합실을 천천히 둘러보면, 만나기로 했던 누군가가 꼭 있었다. 그러면 그자리에 서서 상대를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하는 것이다. 왜 늦었는지,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차저차 그래서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혼자 여행하니까 심심했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동안 너는 무엇을 보았냐고. 나는 어디를 가봤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고. 다시 배낭을 메고 숙소를 찾아가면서.



오늘도 오랜만에 그럴 일이 있었다. 외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비즈니스 상의 이유로 아주 짧게 서울에 왔다. 만나는 날짜와 대략적인 시간대만 정해놓고는 서로 연락을 하지 못했다. 오늘 오전 나는 요가를 하느라 라커안에 폰을 놓고 들어갔고, 친구는 그 사이 '두시쯤 보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반응이 없자 그 이후에 친구에게 온 메시지는 '오늘 못보겠다.' 는 톡.


친구의 출국비행기 시간도 모르고, 어디서 머무르는지도 모른 채, 나는 두시까지 그 곳에 갈 수 있다고 답을 했다. 이번엔 친구의 답장이 없었다. 서둘러 씻고 길을 나섰다. 여전히 친구는 나의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한국 전화번호는 없을 것이고, 보이스톡은 받지를 않고. 미팅중인걸까.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못봐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차근차근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내내 볼 수 있을까. 만날 수 있을까. 한치 앞도 어찌될지 모르면서 일단은 약속장소와 가까운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앉아 어디라고 다시 한번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못봐도 어쩔 수 없지' 삼시분쯤 후 친구는 급한 미팅이 하나 더 생겨 세시 반쯤에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다고, 얼굴 반짝 보고 헤어져야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우리는 오늘 아마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가지 말아야겠다'는 쪽으로는 좀처럼 생각이 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가봐야겠다' 쪽으로 움직이는 타입인 것이다. 왜일까? 아무래도 아직까지 낭만을 믿는 편인 것일까.   


온다는 확신이 없는 상대를 기다리는 일이 만들어 주는 낭만적 순간이 있다. 오지 않거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확신 없는 불안한 기다림이 조금씩 뱉어내는 낭만의 아우라. 그것은 지켜보는 이에게도, 기다리는 이에게도, 혹여 그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는 상대에게도 결국에는 따뜻한 마음을 돌려준다.


아무때고 연락이 가능한 상황 속의 우리는 답장이 오지 않으면 일단 현상태를 유지한다. 일단 씻지 않고, 일단 더 누워있고, 일단 보던 예능을 더 본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게 한다. 편리하긴 하지만 응원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끔 낭만의 기회를 박탈하는 LTE시대가 야속하다. 아무래도 애틋하지 않아서.


나 혼자만의 일이라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그래도 가봐야지 하는 마음이 먹어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당신 때문이다. 나와 약속한 당신때문에. 혹시라도 당신이 기다릴까봐. 그 애틋한 낭만이 선사하는 만남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삶도 비슷하지 않나.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도,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가보는 길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친구는 여섯시반 출국 비행기라고 한다. 강남에서 택시를 타고 오고 있다고 한다. 이십분 동안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움직이지 않았다면 잠깐이라도 반짝 보지 못했을거야. 일단은, 애틋하게 만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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