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벗어나! Run run run away -
몇 달 전에 드라마 보조작가 면접을 보러 갔었다. 작가님이 내게 물었다.
“죽어도 드라마 할 거니?”
...죽으면 딴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기를 했다. 이상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거꾸로 묻고 싶었다. 작가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드라마를 하실 건가요? 왜 내 진정성을 죽음으로 확인하려고 하는지, ‘네’라고 연기하는 능청이나 넉살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님 거짓말은 못하는 정직함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나쁜 질문이었다. 물론 나는 이런 불순한 생각으로 하루만에 잘렸다.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사전적 정의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게 ‘진정성‘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순 없어도 실제로 겪고 나면 그 간의 온갖 노력과 애정, 의지가 마음 저 밑에서부터 차오를 때 사용하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마치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단어다. ‘결과야 어찌되든-‘의 태도로 뭔가를 오래 꾸준히 계속해서 애정해나갈 때 형성되는 무드다. 결과에 얽매여 채점을 위해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완성도와 다르고, 퀄리티와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들과 정반대를 향하는 단어다.
그래서 구직활동을 할 때마다 너무 괴로웠다. 진정성을 증명하라는 자기소개서 항목과, 면접질문들. 제 텃밭을 어떻게 보여드리면 되나요. 어떤 이들은 자기 정원의 사진을 찍었고, 어떤 이들은 텃밭의 열매를 면접장에 들고 왔다. 나는 내 정원을 어떻게 압축해서 들고 가야 할지. 어떤 단면을 보여주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꿈꾸던 직무가 연출자였는데, 이렇게 자기 연출을 못해서야 반드시 떨어질 수밖에. 자기연출을 못하는 지점이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는데, 매번 그런 말을 듣고 정말 ‘나는 진짜 진정성이 없나?‘ 하고 자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건 말라버린 나의 정원이었다.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는 타인의 말이 당신의 진정성을 흔드는 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말 그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한정된 자원 내에서, 짧은 시간동안 나를 평가한다. 내 정원의 흙을 밟아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때, 애써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정성’을 진정성 있게 평가하려면 평가하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많은 품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꾼 정원에 와 볼 의지도 없고, 내게 애정도 없는 사람들이 쉽게 사용하는 말에 나까지 내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말기를.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이 무시했으면 좋겠다. 꾸준히 오래 자신이 걷던 길을 계속 걸어갔으면 좋겠다. 아직은 내 정원의 향기를 남이 맡은 정도는 아닌가보다 하고 갈 길 가자. 그러다보면 담쟁이 덩쿨이 벽을 감싸고, 꽃이 흐드러지고, 내 몸에 맞는 그림자가 벤치 위로 늘어지고, 내가 좋아하는 빛깔의 꽃과 그 향기로 가득 찬 정원이 만들어질 것이다. 타인의 평가는 필요치 않은 안락한 나의 우주가.
진정성을 의심하며 방황하는 동안 내 정원의 모종들은 말라 비틀어졌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더 많은 힘을 들여서야 애초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혹시 누군가 내게 던진 절박해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진정성 없어 보인다는 말에 나처럼 수많은 시간을 스스로를 의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면 당장 때려쳐라. 진정성이 없다면 다른 매력으로 돌파하면 된다. 원래 진정성은 평가의 영역이 아니니까 그것으로 당락이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보조작가를 하지 못한 이유는 함부로 내 자신을 굽히지 않아서지, 드라마에 대한 내 진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쓸데없이 진정성 감옥에 얽매여 진짠지 가짠지 증명하려고 애쓰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