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블 Apr 02. 2019

살아왔던 곳, 살아갈 곳

자취일기_03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미아리고개의 세 칸 짜리 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시모부와 시누이 내외, 그리고 그들의 아들 둘. 거기에 정신이 온전치 않은 시아주버님까지 이 모두가 함께 말이다. 그 집에선 밤에 자려고 누워있으면 쥐가 천장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방문 바로 앞에 아궁이가 있어서 문을 열고 나설 때 조심했어야 했다는 말도 어렴풋이 들은 것 같다. 그곳에서 6년 터울로 오빠와 내가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이사한 20평 남짓의 상계동 주공아파트에서는 다행히도 가족이 줄었다. 시누이 내외와 그들의 자식이 분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넉넉한 공간은 아니었다.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3세대 7명의 사람이 함께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 엄마, 아빠, 오빠, 나. 한 손으로는 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좁은 집에서 살았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다. 상계동 집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는 희미하게 몇몇 장면들이 기억이 난다. 식탁에서 방송통신대학의 수업을 카세트테이프로 빨리 감아 들으며 과제를 하던 엄마가 생각난다. 옆집에 아영이라는 동갑내기 아이와 친했었는데, 아파트 13층 복도를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렸었다. 아영이 집에 있던 컬러점토를 갖고 놀거나, 아영이네 아줌마가 튜브풀장에 물을 채워주셔서 베란다에서 발가벗고 좋아라 놀던 기억이 난다. 전부 우리집엔 없던 놀이도구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인생 첫 가을 운동회를 위해 꼭두각시 안무를 열심히 연습하던 즈음, 우리집은 의정부로 이사를 갔다. 첫 이사, 첫 전학이었다. 애석하게도 의정부의 학교는 운동회가 끝나버려서 ‘꼭두각시’ 안무를 선보일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나랑 연습하던 내 짝은 누구랑 춤을 췄을까. 가끔씩 생각나면 궁금하다. 만약 나 때문에 짝이 없어 춤추지 못했으면 어쩌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아무라도 그 아이와 함께 춤을 춰주었기를. 아무튼, 의정부에서 살 때는 방 4개짜리 아파트였다. 복도가 없는, 한 층에 두 집씩 있는 라인식 아파트였다. 옆집이 아니라 앞집이웃이 생겨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내방이 생겼다.


학교 다녀와 방문을 열어보니 갑자기 피아노가 놓여있어서 순간 우리집이 아닌가 다시 방문을 열고닫은 로맨틱한 기억도 있지만-이후 집을 옮길 때마다 피아노는 얼마나 부담스러운 물건이 되었나-, 처음 생긴 내방에 대한 대부분의 감정은 차갑다였다. 이상하리만치 한기가 돌았다.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과 현관은 무서웠다. 그때까지 혼자 자 본적이 없던 나는 영 내방이 익숙해지질 않았다. 무서웠다. 어두캄캄한 데서 꼭 뭐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엄마가 있는 방까지 문을 열고 뛰어가기엔 너무 멀었다. 엄마가 날 보기 전에 이미 벽장귀신이 나를 잡아먹은 다음일 것이 분명했다.


주로 TV가 있는 할머니방에서 생활했다. 화장실도 거실과 가까운 안방화장실을 주로 사용했다. 저녁도 상을 차려 TV앞에 들고 가서 먹었다. 우리집 식탁은 항상 물건을 올려놓는 선반에 불과했다. 처음 생긴 개인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고 8남매 중 둘째로 자란 엄마와, 5남매 중 넷째로 자란 아빠도 자기방이 무섭다는 딸아이에게 어떻게 독립 공간을 만들어 줘야할지 잘 몰랐다. 그러니까 우리는 방 4개짜리 집에서도 각자의 공간을 마구 침범하면서 살았다. 의정부 집에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6학년, 의정부에서 다시 상계동으로 이사를 했을 때 다시 방은 3개였다. 그 곳에선 아빠의 형이자 할머니의 맏아들인, 내게는 큰아버지였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여전히 할머니와 나는 같은 방을 썼고, 부엌 옆에 엄마아빠 방이 있었다. 남는 방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오빠가 썼다. 내공간 없는 생활은 계속 되었고, 엄마는 그 집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고등학교 1학년. 길음동으로 이사를 갔다. 엄마가 쓰러지기전 내가 정릉에 있는 한 외고에 붙을 줄 알고 미리 사놓았다는데, 나는 그 학교를 떨어졌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던 나는 전학대신 노원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는 법을 선택했다. 방은 여전히 3개였다. 역시 각각 모부의 방, 조모의 방 그리고 오빠방으로 배정되었다. 내방은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각자의 짐을 구분해 넣었을 뿐, 가족들은 항상 어디 한군데 모여 생활했다. 거실에서 다같이 자거나, TV앞에서 다같이 과일을 깎아먹거나. 어디 한군데 ‘누구’의 공간이라고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할머니방 TV 옆 책상에서, 때로는 모부의 방 돌침대 옆 책상에서, 식탁에서 공부하며 자랐다.  


나의 고3-재수 시기에는 오빠방이 잠시 내방이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그 방은 오빠방도 아니고, 내방도 아닌 애매한 상태의 공용공간이 되었다. 이십대부터는 늦게까지 놀거나, 술을 마시거나, 시험공부를 하거나, 친구 자취집에 가서 밤새 수다를 떨거나 등등의 이유로 집에서 잠만 자고 씻고 나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5년전 오빠가 결혼해 분가를 하면서 온전한 내 공간이 처음 생겼다. 내 나이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나만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만, 정작 나는 살면서 불편함을 잘 몰랐다. 태어나서 쭉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계속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왔으니까, 가끔 오빠가 연애할 때, 안방의 TV앞에 드러누워 여자친구와 통화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나 역시 부엌 싱크대에 설치된 전화에 식탁 의자를 끌고 가 앉아 한참이나 친구와 통화하곤 했었다. 아마 통화내용이 온 집안에 다 들리지 않았을까 이제야 조금 부끄럽다.


그래서인지 나만의 방. 나만의 공간. 나만의 것이 갖는 느낌을 아예 몰랐다. ‘혼자’ 밥 먹을 일이 생기면 차라리 굶어버리고, ‘혼자’가느니 안 가버리던 일들이 많았다. 생활밀착형으로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들을 좋아했다. 무언가 나에게 다 털어놓지 않는 느낌이 들면 서운해하고, 토라지던 학창생활이었다. 혼자만의 시간,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내가 싫다는 말로 받아들이던 어린 시절이었다. 아마 혼자만의 시간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 문을 열면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만이 있었다. 24시간 중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혼자이고 싶다는 욕구도 생겨날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자취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이제는 독립된 가정을 꾸려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더 이상 네방도 내방도 아닌 가족모두가 집 전체의 공간을 공유하는 형태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는 친구들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사는 멋진 ‘으른’으로 보였고, 나는 애송이였다. 아무리 혼자 하겠다고 발버둥을 쳐봐도 결국 분리수거를 내놓는 일도, 빨래를 개어서 옷장에 넣는 일도 내가 하지 않았다. 화장실 배수구의 머리카락 한번 치워보지 않았으며, 먹고 남은 음식물은 그냥 싱크대에 올려두는 데까지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무슨 혼자 알아서 하겠다는 말이냐. 엄마가 날 늘 애취급하는 것도 그럴만 했다. 집에서는 무언가 해보려고 해도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았다. 평생을 ‘혼자’ 살지 못하던 공간에서는 어떻게해도 혼자 내 삶이 책임져지지가 않았다.


나는 오롯이 내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나를 한심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지만, 혼자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20대 이후로 나만의 공간을 혼자의 힘으로 꾸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이다. 학교 앞 술집에서 맥주한 잔 하다말고 빨래 널고 올게 하고 방에 다녀오는 친구들을 보면 질투가 났다. 어쨌든 집에서 언제오냐는 연락이 오지 않는 친구들이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들의 옷에서 나던 섬유유연제 냄새는 언제나 더 좋게 느껴졌다. 나는 세탁기를 어떻게 조작해야 그런 좋은 냄새가 나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근 10년간 안고도 스스로 변화를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쉽고 편한 일이니까. 살던 대로 살았다. 정년퇴임한 모부와 24시간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해도, 불평불만만 갖고서 섣불리 독립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 상태에서 월세로 나가는 건 돈을 모으지 못하니까. 또 나가서 밤에 혼자 잠들 생각을 하면 두렵고 불안했다. 햇빛도 잘 들고 넓으며, 욕조도 있고, 사람이 살 만한 집으로 첫 독립을 하고 싶기도 했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살았다.


독립 20일차. 이제야 친구들이 한 사람 몫의 생활을 책임지며 학교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다. 통학하는 시간이 5분도 걸리지 않던 점을 부러워했지만, 그들이 세탁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던 시간들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역시 멋진 ‘으른’이 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이제라도 나잇값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땅바닥에 돈을 버린다는 월세지만, 그럼에도 혼자만의 공간은 필요하다. 그것이 질척한 현실을 그대로 담은 허름하고 빛도 잘 들지 않는 월세방이라고 해도. 주위가 적막하여 혼자 있는 것이 때로는 두렵고 불안해도 나름의 좋은 점이 있다. 일단은 내가 내 삶을 오롯이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일상이 주는 이상한 안도감이 있다.  고단한 살림이 일단락되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해 나갈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아님 말고 외면할 수도 있다.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나의 작은 방에서 나는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남에게 갖던 관심을 나에게 돌릴 수 있다. 나를 오래 바라보고, 오래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나를 아껴줄 수 있다. 그 점이 참 좋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더욱 무럭무럭 자라도록 다음 방은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지금부터 내가 살아갈 곳은 우리집이 아닌, 나의 방이다. 집이 아닌 방이라 때로 슬프지만, 그래도 ‘내’방이라 괜찮다.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음악을 많이 듣게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