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블 May 10. 2019

똘끼와 맷집

자취일기_05

삶이 계속될 수 있는 조건은 뭘까? 


20대 중반까지는 ‘당연한’ 것들이 참 많았다. 당연히 PD가 될 줄 알았고, 당연히 내 나이대 평균 수준의 월급을 받을 줄 알았고, 당연히 드라마에 나오는 세트 같은 오피스텔에서 독립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당연히 그 모든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자 있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내가, 혼자 씨름해야 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고, 혼자 월세 자취방에 살고 있다. 


오늘은 보조작가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다. 동시에 월세를 내는 날이라, 월급의 상당부분이 그대로 스쳐지나갔다. 통장 잔액을 보면, 심란하지만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돈을 번 건 처음이었으니까.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내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명제를 실천해냈으니까. 


지금도 한 달 동안 이야기를 짜고, 캐릭터를 고민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를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는게 너무 신기하다. 물론 안정적이지 않은 일이라, 언제 어떻게 월급이 끊길지 모르는 일이지만. 불안에 떨면서도, 오늘 통장에 찍힌 월급을 보니 기뻤다. (작고 귀여운 내 월급... 너무 작아. 하찮아. 귀여워. 어떡해.)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번다는 일은, 학생이던 나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 당연한 일이 내 삶 위에서 가능하게 하는데 꽤 오래 걸렸다.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로 월급을 받았으니까.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일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여전히 계속 배워나가고 있다.


내 힘으로 내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에 꽤 많은 에너지가 든다. 의식주를 꾸려나감과 동시에 자아실현의 노력을 한다는 건 얼마나 ‘건강한’ 정신과 얼마나 ‘건강한’ 육체가 필요한가를 매일 고꾸라지면서 배운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당연하지 않았고, 하루하루 고역이다.   


풍랑 치는 대양에 내팽개쳐졌다는 생각에 그대로 주저앉아 선실 안에 쳐박혀 어떻게든 되겠지 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언젠가 태양이 뜰 것을, 육지에 이를 것을, 그 믿음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당장 무엇을 하지 않는 나를 다그치다가도 괜찮다고 도닥여주는 사람들의 말을 속는 셈 치고 믿어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우비를 입을 생각도, 갑판 위로 나가 볼 생각도 하게 되었다. 조금씩 우비를 입고 나가 폭우를 맞으며 돛을 올리는 내 모습을 머리로 상상하기도 하고, 실제로 우비도 몇 번을 입었다 벗어보고. 정말 안되겠다고 다시 누웠다가 또 일어나 어쩌지 하다 보니 어느새 온 몸으로 파도를 맞고 있었다. 


선실에서 나와 보니 다들 폭풍우 속에서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치며 나아가고들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우산이나 우비, 천장이 있는 공간이 당연하게 주어진 건 아니었다. 갑판 위에서 밧줄을 당기다 보니, 오늘 여기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비와 파도에 이미 흠뻑 젖었다. 이제 더는 옷이 젖는 일이 두렵지 않아서 기쁘다. 본 적 없는 거대한 파도가 두려워 다시 또 선실로 기어들어가게 되는 날이 올지라도, 오늘은 일단 귀여운 내 월급에 기뻐하며 비를 맞아야겠다. 


삶의 조건은, 선실의 평수나 습도가 아니라. 갑판 위로 나갈 수 있는 똘끼인 것 같다. 더불어 그 한 번의 똘끼를 위해 아주오래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들을 버텨내는 맷집과.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왔던 곳, 살아갈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