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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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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Mar 20. 2019

음악을 많이 듣게 됩니다.

자취일기_02

음악을 많이 듣게 됩니다.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집에서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았습니다. 구태여 소리를 재생시키지 않아도 이미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요리할 때 틀어놓고는 제대로 끄지 않은 라디오 소리. 아빠가 거실에 틀어놓은 TV 속 종편보도 앵커의 목소리.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 누군가 집을 돌아다니며 만드는 발바닥이 장판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때 되면 벌컥벌컥 방문을 열어 제치고서는 밥 먹어라 하는 잔소리 등등. 무수히 많은 소리들에 또 하나의 소리를 굳이 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취를 하고 나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입니다. 생활 소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큰일인지 몰랐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살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은 소리들이었는데. 막상 내가 만드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니, ‘아. 나 혼자 살고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소리가 들려오면 일단은 불안합니다. 같은 건물에 사는 다른 사람들이 오갈 때 번호키가 작동하는 소리. 창문 밖 차에 시동 거는 소리는 또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미어캣처럼 얼굴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려움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발생지를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잔뜩 굳은 채로 맞이합니다. 미세한 소리라도 들리면 하고 있던 동작을 그대로 멈춥니다.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일시정지 상태로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발걸음 소리가 내게 오는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냉장고 웅-돌아가는 소리. 보온 중인 밥솥에서 나는 뚝, 뚝 소리. 건조대에 말려놓은 옷이 사르륵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라 자세를 바로 합니다. 세렝게티에 가장 약한 초식동물처럼. 미어캣은 몇 십 마리가 늘 함께 있던데 나는 혼자 있구나. 다시 또 깨닫습니다.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소리를 재생합니다. 적막과 고요를 깨기 위해 소리를 틀어 놓습니다. 자취방에서 제일 많이 한 일은 모바일 데이터를 다른 기기에 연결하는 일이었습니다. 본가에서는 사놓고 몇 번 쓰지도 않았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자주 사용합니다. 어제는 밤새 백예린의 신보를 들었습니다. 잊고 있던 음악의 효용을 새삼 다시 알게되었습니다. 사운드에 묻혀 외부 소리가 잘 안들리게 되기도 하고, 날 서 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기도 합니다.


밥 먹을 땐 들을 것을 넘어서서 꼭 볼 것이 필요합니다. 넷플릭스와 푹을 번갈아가며 예능과 드라마를 섭렵합니다. 그러다 꼭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자리를 뜨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도 일어납니다. 이 글을 쓰러 나오기 직전까지도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1회를 시청하였습니다. 얼려놓았던 식빵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재생을 눌렀습니다. 토스트는 30분만에 다 먹었는데,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남은 커피를 마시면서 결국은 1회를 다 보고 만 것입니다.


한동안 굳이 음악을 찾아듣지 않았던 것은 주변이 온통 소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잠들 때 어떤 음악을 들을 지 고민하고, 샤워할 때는 어떤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할지 생각하는 일이 자취 열흘만에 매일 해야 할 가장 큰 과업이 되었습니다. 왜 늘 싱크대 선반에 라디오가 빌트인 되어있는지. 냉장고 옆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걸어둘 고리를 발견하고 좋아하던 저를 보며 모르던 사실을 하나 또 배웠습니다.


밤마다 유튜브를 떠돌아다니고, 음원 사이트에 차트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소소한 취미가 생겼습니다. 서밤이 팟캐스트 <서늘한마음썰>에서 알려준 유튜브 ‘majestic’ 채널이나,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쓰신 김하나-황선우 작가님의 트위터 공동계정 ‘@hawaii_delivery’는 마치 보물섬 같았어요. 빛나는 플레이리스트를 갖고 있었습니다. 큐레이팅과 마케팅은 뭐든지 과한 이 시대에 참 중요하단 생각도 언뜻 스쳤습니다. 넘쳐나는 콘텐츠 사이에서 의미있는 배열을 만들고, 대중이 먼저 주목할 수 있게 한다는 것. 이제 자취 열흘차인 저에게는 고마운 일입니다.


아무튼, 이제는 나도, 좁은 음악취향이 넓어지게 될까 살짝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여전히’ 음악을 많이 듣는 친구들을 보면서 신기하다고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그 친구들은 높은 비율로 혼자 사는 친구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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