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일기_04
일 마치고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낮에 건조대에 널어놓고 나온 빨래부터 개야한다. 손을 씻고 수건에 코를 대고 킁킁대면서 잘 말랐나. 이상한 냄새가 나지는 않나. 확인하며 개킨다. 마음 내키는대로 어느 날은 동그랗게 말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직사각형으로 접기도 하고. 화장실 선반에 수건을 착착 밀어넣고 나오면 분리수거가 한가득이다. 말그대로 한가득. 혼자 사는데 대체 왜 이렇게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것인가. 모든 식재료는 그것의 포장지와 함께 내방으로 들어오니까. 택배라도 받을라치면, 박스와 아이스팩, 단열포장까지 난리다 난리. 수북이 쌓여있는 포장지들은 종이류, 비닐류, 플라스틱류 나눠서 담는다. 신나게 뜯을 때는 좋지만, 내놓을때까지 손이 두세번은 더 가야 한다. 재활용 쓰레기들은 제 때 내 놓지 않으면 또 며칠 걸리니까 오늘 정리해서 내놔야한다. 삼선슬리퍼를 직직끌고 나가 빌라 앞에 내놓는다.
이제 옷 좀 갈아입을까 치면 아침에 부산스레 좁은 방을 이리저리 다니며 어지럽혀 놓은 물건들이 그대로 있다. 향초나, 핸드워시, 미니어처들이 내가 놓은 그 자리에 있는 건 정말 사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내가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나온 잠옷, 머리말리던 드라이기와 수건, 일어나자마자 마신 물컵 역시 내가 놓은 그 자리에 있다는 건 내게도 도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키워준다. 이 방에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어서 치워준다면 행복하겠다. 애석하게도 나는 혼자 사니까 내가 치우지 않으면 아무도 치워주지 않는다. 아무튼, 다시 일일이 주워서 제자리에 갖다놓는다.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간다. 화장실 벽에 물때가 보인다. 배수구 청소도 해야 할 것 같다. 씻기 전에 땀흘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붙잡고 치우기 시작한다. 한 번 시작한거 기왕이면 깨끗하고 군때없이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 날 저녁은 이제 다 먹었다. 밥을 해먹기 전에 이미 지쳐버리고 만다. 응. 저녁도 그냥 시리얼 먹을까?
씻고 나오면, 바닥에 떨어진 미세한 머리카락과 먼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빨래 널고 갤 때 나온 먼지들과 머리카락이 자유롭게 뒹굴고 있다. 청소기를 돌린다. 침대 매트커버와 이불에 있는 불순물들도 돌돌이로 밀어본다. 그러니까. 발 닿는 곳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한히 일이 증식한다. 쉬러 들어가는 공간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을 해야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화장실이나 싱크대 배수구, 세탁기 먼지 거름망을 치우는 날에는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다려 입는 옷은 사지 말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병법을 쓴 손자의 목소리처럼 내면에서 메아리친다. 가사노동이 끝나지 않는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일단락을 지어야 한다.
몇 주간 요령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다가 깨달은 나의 가사노동 전략은, 일단락이었다. 지금 급한 일이 아니면, 좀 놔둬도 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골병이 난다. 설거지 해야 할 그릇이 보이면 일단 하고 봤는데, 그러면 안된다. 동작을 멈추고 ‘설거지 지금 꼭 해야 하는가?’를 되묻는다. 내가 할 일이 그것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우선순위는 ‘1.저녁을 먹는다 2.씻는다’에 있어야 하는데, 다른 일을 하다 저녁도 못먹고 씻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하려면 저녁을 다 해먹고 하는 게 나으니까.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이 못마땅해도 일단은 놔둬야한다. 그러니까 미루는 요령이 필요하다. 미루면 게으름쟁이가 되는게 아니라, 미뤄서 현자가 되는 것이다. 가사노동은 다른 어떤 일보다 일의 우선순위를 잡는법과 타이밍이 중요하다. 제 때에 밥을 해먹을 수 있도록, 먼저 내 몸부터 돌볼 수 있도록. 그러니까 어떤 가사노동이든 일단 멈춰서, 맥락을 살피고 앞으로 만들 단락을 구성해야 한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한다쳐도 곧 다시 먼지는 쌓인다. 화장실 청소 역시. 곰팡이 하나도 용납할 수 없다면 그날 씻는 건 포기해야한다. 그러니 이만하면 됐다 싶은 선에서 청소기 코드를 뽑는 법도 배워야한다. 그래야 쉬기도 하고, 씻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 할지 미리 단락의 내용과 시기를 정해놔야 한다.
일단 여기까지. 그리고 다음에 언제.
이 마음이 없으면 집에서 쉴 수 없다. 당장 다 해치우려는 마음으로는 꾸준히 혼자 공간을 꾸려나갈 수 없다. 조급한 마음, 완벽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을 가사노동을 통해서 배운다. 머리카락은 계속 흘러나오고, 배수구의 흘러들어가는 쌀알들도 계속 생길테니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이틀 뒤, 일주일 뒤, 어느 순간에 해야 할지 일정을 정해놓는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미루지 않고 한다. 그러면, 좀 숨이 트인다. 집에서 느긋하게 쉴 수 있다. 좀 더 느긋하게 지낼 수 있게, 요령이 더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