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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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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Sep 24. 2019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고

자취일기_08

        

네가 오면 침대가 좁아진다. 내 몸무게에 대략 두 배인 너와 함께 누우면 나의 싱글 매트리스는 꽉 찬다. 나는 벽에 딱 붙어 콘크리트의 냉기를 얼굴에 느끼며 자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쩐 일인지 너도 꼭 그 자리에서 자려고 한다. 꼭 매트리스 안쪽에서 자려고 한다. 몇 번 네가 씻을 동안 냉큼 누워 침대 안쪽 자리를 차지해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 좁은 침대가 너에게 불편할 것 같아서 이제는 그냥 내가 바깥자리에 눕는다. 안 그래도 좁고 불편한데, 굴러 떨어질 걱정 없는 벽 쪽에서 자라. 난 출근 시간이 늦어 늦잠 자도 되지만 넌 일찍 나가야 하니까.      



화장실에서 샤워하다가 문 틈 사이를 밀고 들어오는 커피의 향을 맡게 됐을 때, 올리브영에서 산 라벤더향 보디워시와 로즈마리 향 두피 케어 샴푸 냄새를 이기고 끝끝내 스타벅스에서 산 에티오피아 원두향기가 내 코끝을 스쳤을 때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 좁고 어두운 단칸방에 나 말고 누군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화장실에 들어와 있으면 문 밖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소리도, 냄새도 나지 않는 이 공간에. 나 말고는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이곳에. 네가 있다. 물을 끓이고, 분쇄된 커피가루를 덜고, 천천히 물을 붓고 있는 누군가 있다. 혼자가 아니다. 얼른 샤워를 마치고 나가고 싶어진다. 네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김치전을 딱 세장만 부쳤더니, 5분도 안돼서 다 먹고 반죽부터 다시 만들어 먹은 날도 있었다. 기어코 네 장을 더 부쳐서 갖고 오던 너. 먹어줄 이가 있어서 그런지 네가 오면 요리를 한다. 혹시 맛이 없으면 가위바위보 해서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울 수 있어서일까. 가지 반토막만 참기름에 볶아 밥에 얹어먹었던 날에는, 맛이 괜찮길래 밥 다 먹고 나서 다시 나머지 반토막을 그대로 참기름에 볶았다. 혼자 있었다면 밥 먹기 전에 가지를 씻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오면 괜히 이것저것 불 앞에서 시도해본다. 너는 간이 쎄다고 했는데 오늘 냉장고에 넣어두어 차게 식은 가지 볶음을 먹어보았더니, 내 입에는 먹을 만하다.      



너는 명대사는 칠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내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어느날 화장실 가장 윗칸 수납장의 수건을 아래칸으로 옮기고 있는 네 뒷모습을 보기도 하고, 드르륵 거리던 선풍기 날개가 조용히 잘 돌아가고 있는 걸 보기도 했다. 네가 놓아준 모니터로 온갖 예능을 깔깔거리며 본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네가 음식물 쓰레기도 버려주고, 분리수거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담 벽쪽 자리를 좀 더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거다.


      

언젠가 이 방을 떠날 때가 오면 이런 기억들이 날 것 같다. 내 첫 자취는 혼자가 아니어서 영 혼자 있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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