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하는 분홍 물결
지난 2월 4일 입춘(立 春)이 지나 2월 19일 우수(雨 水)를 앞두고 있다. 동풍이 불면 언 땅이 녹기 시작해 땅속에서 잠자던 벌레들이 깨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꽁꽁 얼은 얼음 아래에는 물고기가 살랑살랑 헤엄을 친다. 겨울나무가 품고 있던 겨울눈도 생명의 씨앗을 틔운다. 생명이 기지개를 켜면 산과 들은 겨우내 팍팍해진 회색빛 옷을 벗고 산뜻한 분홍 옷으로 갈아입는다. 집 근처 원미산에는 진달래 동산이 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사람들은 분홍 물결을 보러 손에 손을 잡고 꽃구경을 갈 것이고 진달래는 고고한 자태로 군무를 출 것이다. 진달래와 철쭉은 닮았지만 진달래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고 철쭉은 꽃이 핌과 동시에 입도 자란다. 진달래는 독성이 적어 먹을 수 있어 <참꽃>이라 부르고 철쭉은 독성이 강해 먹을 수 없어서 <개꽃>이라 부른다. 진달래는 꽤 오랫동안 서민들이 배고플 때 먹는 꽃이었다.
해방 후 50~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은 배 곯기 일쑤였다. 매서운 추위가 닥치는 겨울밤, 춥고 배고파 자식들이 칭얼거리면 어미는 아껴놓았던 무를 마음먹고 꺼내와 몇 조각을 잘라준다. 아이들은 껍질채 싹싹 씹어먹는다. 달큼하고 시원한 무즙이 입 안을 촉촉하게 적신채 뱃속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든다.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새끼들이 안쓰럽고 겨우내 갈무리한 재료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부모의 한숨도 깊어진다.
낮이 길어지고 햇볕이 따뜻해지는 봄이 찾아오지만 갑자기 먹을 것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 파릇파릇한 보리가 여물기 전까지 더 버티어야 하기에 사람들은 봄을 '춘궁기'라 불렀다. 새순이 돋고 산이 알록달록하게 변하기 시작하면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산을 오른다. 색색이 탈바꿈하는 산에서 관심은 두 가지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그들에게 진달래는 봄의 전령사로서의 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고마운 꽃이다. 입에 넣어도 괜찮다는 것이지 뱃속을 든든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기 일쑤이다. 하지만 입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마음에 위안이 된다. 아이들은 산에 올라 진달래를 씹고 엄마들은 쑥을 캔다. 진달래와 더불어 지천에 자라는 쑥은 춘궁기에 먹을 수 있는 고마운 풀이다. 쑥에 찹쌀가루를 흩뿌려 살짝 쪄서 속을 채운다. 형편이 안 좋을수록 쑥은 왕창 들어가고 찹쌀가루는 뿌린 듯 만 듯 넣는다. 쑥색이다 못해 시커먼 쑥버무리라도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50, 60년대 춘궁기를 겪은 부모님은 산에 빠삭하다. 함께 여행을 가다 보면 종종 멈춰서 이건 먹을 수 있는 거라고 그냥 두기 아깝다고 뜯는다. 나는 두릅이 자라있어도 모르고 지나치는데 엄마, 아빠는 두릅, 뽕나무, 민들레, 각종 풀을 알려준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오히려 많이 먹어 풍요병에 걸리는 오늘날, 봄이 오면 진달래가 생각나고 진달래를 보면 산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닌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그려보게 된다. 사뭇 많은 이들이 진달래로 시를 짓고 곡을 쓴다.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분홍물결을 이룬 진달래는 서민들에게 조금만 더 버티라고 위안을 주는 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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