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이 순간을 현재의 눈으로 보지 마라.
먼 영원의 눈으로 현재를 보라.
-스피노자-
너무 고통스러우면 살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운다고 한다. 하지만 지운다고 무의식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기억을 발화시키는 버튼이 삶의 곳곳에 지뢰처럼 숨겨져 있다. 조심스럽게 피해 다니지만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모르기에 결국 지뢰를 밟고 만다. 소녀는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느 특별한 날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이다. 어제까지 안녕, 잘 자 하고 인사했던 엄마, 아빠, 오빠, 친구들이 사진 속에서 하나, 둘 사라진다. 결국 사진 속은 텅 비어버리고 소녀 혼자 남아 웃고 있다. 사진을 보던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지워진 기억이 허구의 세계를 깨뜨리며 쏟아져 들어온다. 현재에 함께 있다고 느꼈던 그들이 사실은 수십 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말도 안 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니 믿을 수 없어. 나만 남는 건 너무 고통스러워. 나도 데려가 줘. 그들이 사라진 결정적 그날의 기억까지 다다르면 소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편안하고 평범한 일상 속으로. 그렇게 기억은 다시 봉인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들이 이미 지나간 과거라면,
나는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고 기나긴 꿈을 꾸는 거라면.
가사상태로 그들을 만나고 있는 거라면
가끔 내가 발을 대고 있는 이곳이 현재가 아니라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낯선 행성에서의 빛이 어우러진 잔영
지금의 내 삶은 내가 죽은 후의 먼 미래에서 되돌아보는
스크린에 지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나는 사슴이다>는 내게 풋풋한 청춘의 한 페이지다. 결과물은 나에게 기쁨을 주었지만 매일 반복되는 작업과정은 결코 기쁨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민과 힘듦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난다. 하지만 영원의 눈으로 보면 어떤가. 힘듦도 기쁨도 아련하게 그리운 추억일 뿐이다.
마일클 싱어는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얻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경험하는 무엇이다. 삶은 당신과 함께, 또는 당신 없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수십억 년을 이어져 왔다. 당신은 단지 그 작은 조각 한 편을 목격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삶의 목적은 경험을 즐기고 거기서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푸른 별 지구에 70억 명이 살아간다. 그중 내가 평생 관계를 맺는 사람은 극소수니 운명이라는 말을 써도 거창하지 않다. 내 인연의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고 결국은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내가 소멸함으로써 나의 세계는 끝난다. 당장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을 뿐이다.
삶의 유한함을 자각한다면 감사하지 않을 순간이 하나도 없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무한하게 계속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착각하기에 감정에 널뛰고 작디작은 것에 목숨 걸며 아웅다웅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가 먼 미래에서 되돌아보는 스크린이라 생각하니 가슴에 서늘한 찬바람이 분다. 따끔하게 아프다. 지금 내 모습이, 함께 있는 사람들이 벌써 그리워진다.
깨어있어야 겠다. 오늘만 있는 것처럼 살아야겠다.
오늘이 바로 영원이니.
너희의 오늘이 바로 영원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