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 당첨된 변소 이야기

by 연은미 작가
밤똥참기/이춘희 글.심은숙 그림



국민학교에 입학하니 한 달에 한 번 저축의 날이 있었다. 은행직원이 오면 아이들은 길게 줄을 서서 푼돈을 저축했다. 돈을 내면 통장에 금액을 적고 타원형의 작고 빨간 도장을 찍어줬다. 엄마는 매 달 천 원씩 주셨다. 돈 백원도 용돈을 받아본 적은 없는 내게 천 원은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어느 날 저축하라며 준 돈을 들고 학교를 가다 문방구에 들어갔다. 등굣길 문방구는 참새가 빠트리지 않고 들리는 떡방앗간이었다. 문방구는 언제나 아이들로 북적였다. 와글와글한 문방구 안을 기웃거리면 10원에 한 두 개씩 파는 캐러멜과 색색의 사탕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보고 있으면 침이 고였다. 평소에는 그림의 떡으로 지나쳤는데 그날따라 너무 먹고 싶었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더했다. 충동적으로 천 원을 내고 캐러멜 한 움큼을 샀다. 학교에 가면서 캐러멜을 먹었다. 입 안에 달콤한 향이 퍼졌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하는 길에 내 눈을 유혹하는 게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샛노랗고 투명한 설탕과자였다. 노상에 엄청 큰 잉어, 용 등 화려한 동물 모양의 설탕과자가 뽑기 1,2,3등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비늘모양이 각인된 큰 잉어가 내게 말을 걸었다. "한 번 해 봐. 너한테는 돈이 있잖아. 응? 뽑아서 날 가져가" 나는 잉어의 주문에 걸려 들어 돈을 꺼내고 있었다. 실망스럽게 뽑기는 꽝! 가장 작은 설탕과자를 받았다. 와그작 깨물어먹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침에 남은 단맛까지 없어지고 나니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금하라고 준 돈으로 군것질을 하다니 엄마한테 들키면 난 죽었다. 그때부터 돌덩이가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더 이상은 무서워 못쓰고 남은 동전과 통장을 가방에 넣고 며칠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엄마를 속일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다. 바로 통장 위조! 통장을 꺼내 연필로 날짜와 입금란에 '1000'을 썼다. 문제는 옆에 찍은 빨간 도장인데 살살 따라 그리다 망쳐버렸다. 지우개로 문지르다 침으로 살살 닦았다. 통장 종이가 일어났다. 눈앞이 깜깜했다. 다음 달 저축날까지는 최대한 들키지 않고 지내는 수밖에 없다.


내 비행은 금세 들키고 말았다. 어둑해지는 저녁에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언니가 불렀다.

"야! 엄마가 빨리 오래. 너 통장에 돈 안 넣었어? 엄마가 가방 열어봤어"

헉! 어떡해!! 큰일 났다!

겁을 잔뜩 먹고 들어가니 엄마는 밀가루 반죽을 미는 굵고 긴 홍두깨를 들고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돈을 쓴 것도 나쁜데 통장에 한 짓 때문에 엄마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다. 홍두깨로 바닥을 치며 무섭게 야단을 치다 급기야 내 옷을 홀딱 벗겨서 내쫓았다. 울면서 집 밖으로 나왔다. 알몸으로 갈 데가 없었다. 얼른 몸을 숨겨야 했다. 그때 생각난 장소가 변소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더럽고 무서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내 몸을 숨겨준 고마운 장소였다.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제발 이 시간에 아무도 변소를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도 없고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언니가 다시 들어오라는 엄마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고 사건은 끝났지만 통장 사건과 알몸으로 숨었던 변소는 웃기고도 야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빌라, 반지하라 해도 웬만해서는 화장실이 안에 있고 좌변기다. 물을 틀면 뜨거운 물이 바로 나온다. 얼마나 세상 살기, 아니 볼일 보기 좋은 세상이다.


결혼을 하고 만화작업을 새벽까지 하던 시절, 엄마 생신 즈음 홍두깨로 맞고 쫒겨난 사연을 라디오 사연에 보냈는데 당첨되어 사연이 소개되어 엄마에게 꽃바구니를 보내드렸다. 엄마는 '내가 홍두깨로 때렸다고? 내가 그랬나? 기억 안 나는데?' 하신다. 그리고 꽃바구니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셨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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