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몇 년 동안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육아서이다. 아이를 잘 키우고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책 육아도 하고 싶었다. 막상 아이를 키우다 보니 별 것 아닌 일에 헐크로 변신했다. 감정이 널뛸 때가 많아 괴로웠다. 심리서를 사서 읽었다. 그렇게 내 책과 아이들 책이 벽마다 들어찼다. 살면서 다른 욕심은 부린 적이 없는데 아이를 낳고 책 욕심을 부렸다. 책 육아는 어정쩡하게 실패했고 아이들이 외면한 책들이 책장에 그득했다. 내 책장에 들어찬 육아, 심리서, 자기 계발서, 약간의 소설책들도 먼지가 쌓였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추천해 주는 책 지도를 따라가기도 한다. 당시 필 받아 샀던 책인데 타이밍을 놓쳐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은 책들도 있다. 그 당시 마음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지적 허영심에 샀다가 5년이 지나도 읽지 않는 고전 교양서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책 표지를 보며 진지하게 묻는다. 좋은 책이지만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까? 대답은 '아니다'
그동안 책으로 쌓은 내 시간이 버려지는 것 같아서, 혹은 다시 볼지 몰라서 가지고 있었지만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먼지가 뽀얗게 쌓여 처박혀 있으니 책들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소중한 건 만져주고 애정을 줄수록 빛나는데.
결심했다. 비우자!
공간을 넓게 쓰고 싶다.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싶다. 깨끗하고 좋은 책은 인터넷 서점에 팔고 전집은 중고거래 사이트에 등록했다. 줄을 그었거나 깨끗하지만 중고 거래가 안 되는 책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 트레이가 없다. 책 무게가 상당하여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묘안이 떠올랐다. 집에 있는 오래된 대형 트렁크에 책을 쑤셔 넣고 여행 가듯 끌고 분리수거장까지 간다. 세 번이나 트렁크에 책을 넣고 버리고 반복했다.
세 번째로 트렁크를 비우고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위층에 사는 또래 엄마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인사 후 딱히 할 말이 없는 어정쩡한 관계라 침묵이 들어찬다. 좁은 공간의 침묵은 어색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윗집 엄마가 말을 이었다.
"... 어디 여행 다녀오는 길이세요?"
내 옆에 있는 커다란 여행 트렁크를 보며 긴가민가 하는 눈치다. 행색은 일상복이니 헷갈릴 수밖에.
"아! 하하. 이거 분리수거 중이에요. 무거운 거 넣고 버리기 딱 좋더라고요."
"어머나. 엣지있다!"
위층 엄마의 가벼운 농에 서로 기분 좋게 웃으며 헤어진다.
들어와 가벼워진 방을 둘러본다. 기분이 좋아진다. 비우고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싶다. 있는 것은 더 아껴주고 싶다. 공간도 내 속도 털 것은 털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가볍게 할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