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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작가 Jan 07. 2023

메마른 땅에서 자존감이 자라다

선순환으로 터닝포인트

운동, 변화의 시작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유영만, 김예림>에서 추진력과 열정은 생각이나 마음이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원동력이다라고 했다. 20대 만화가로 데뷔하고 전력투구하느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몇 년을 보냈더니 근력이 훅 빠지고 건강이 나빠졌다. 그 경험으로 열정을 뒷받치는 것이 '몸'임을 체감했다.


무기력하다면 우선 걷자

방학에 널브러져 뒹굴거리는 걸 보다 못해 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아니, 제안이 아니라 요구였다. 처음엔 귀찮아하더니 의외로 꾸준히 따라 걸었다. 한 달, 두 달, 6개월을 넘어가니 습관이 좀 잡혔다. 1년 정도 되었을 때 아침운동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한 바퀴만 걷고 들어가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나는 아파트 두 바퀴를 걸었다. 솔직히 운동을 함께 꾸준히 하는 게 쉽지 않았다. 혼자 내 리듬대로 걸으면 가뿐한데 아들을 깨우다 보면 나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잘할 때도 있었지만 귀찮아할 때도 많았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안 걸으려 했다. 아들을 깨우고 다독이다 보면 욱 하고 화가 올라왔다.  이마에 참을 인자를 무수히 새겼다. 그래도 운동은 한 번 빠지면 두 번 빠지기 쉽고 못 할 이유는 백만 가지가 넘게 생긴다는 것을 알았기에 끈기를 가지고 아이를 다독였다.

운동을 하니 기초체력이 올라간 건 당연하고 어느 날 집에 들어가니 샤워를 했다고 자랑을 했다. 뭐? 진짜? 씻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안 씻던 녀석이? 땀이 나서 한 번 씻어보니 운동 후 샤워하는 상쾌함을 알아버린 것이다. 아침, 저녁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학교에서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운동하면서 얻은 장점이다.



 

편견 없는 선생님을 만나다

아이들은 섬세하고 예민한 존재다. 학기 초가 되면 선생님이 학생들을 파악하듯이  학생도 담임선생님을 파악한다. 조건적으로 예뻐하는지, 아이들에게 진심인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예민하고 까칠한 성향을 가진 아들은 반대로 보면 섬세한 성향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눈치가 빠른 아들은 사람들 말과 반응에 촉이 예민했다. 감사하게도 선생님은 성적이나 잘하는 것으로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분명 아들의 까칠함과 여러 문제들을 파악했을 텐데 작은 변화에도 아이를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칭찬해 주셨다. 담임선생님이 편견 없이 자기를 대한다는 것을 느낀 후 아들은 마음의 문을 좀 더 열였던 것 같다.  학교 생활에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성적이 갑자기 좋아진 건 아니다. 공부습관이 하루아침에 잡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태도가 달라지니 아이들과 관계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아들은 중 3이 되어 리셋을 하고 새로운 1년을 보내고 싶어했다. 학기 초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칠판을 닦아놓고 선생님 도울일을 찾아서 했다. 아들 말로 선생님이 자기를 예뻐한다는 말을 했지만 선도차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1학기 상담시간이 되어 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들이 학교 생활을 너무 잘하고 있고 수업태도도 좋고 학급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칭찬하셨다. 2학년 때 성적이 좋진 않지만 지금 공부하는 걸로 보면 성적이 안 오를 수가 없다고 믿는다고 하셨다.  수포자였던 아들. 아니 본인 입으로 자기는 수포자였던 적이 없단다. 수학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 수안자(수학을 안 한 자)가 맞단다. 2학년 하반기부터 수학을 붙잡기 시작하더니 몇 달 만에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성적을 올리고 2학년 때 수학점수 17점에서 3학년 2학기 시험은 89점까지 끌어올렸다. 언제부턴가 친구들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는 입장이 되었다고 뿌듯해했다.




피아노를 배우며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끼다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난 8월 말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대충 배우던 피아노를 그만둔 지 2년 만이었다. 어느 날부터 집에서 피아노를 뚱땅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아들아, 피아노 다시 배워볼래?"

"어? 음..... 그것도 괜찮지."

그냥 한 번 물어본 건데 거절하지 않았다. 어, 정말 배우고 싶다고? 진짜로 알아봐야겠네. 어떤 곳이 좋을까? 아이들이 와글와글 많은 학원에 젊은 선생님이 있는 학원은 선택지에서 제외시켰다.(초등학교 때 그런 학원을 오래 다녔었다)

그럼 어디를 보낼까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일이 있어 갔던 오래된 상가 2층 맞은편에 이제 막 시작한 작은 피아노 학원이 눈에 띄었다. 바로 들어가 상담을 했는데 선생님은 내 또래로 보였고 느긋해 보였다. 뭔가 괜찮을 거라는 감이 왔다. 아들에게 전해 들은 선생님은 피아노를 좋아하고 즐기는 분 같았다. 아직 수강생이 별로 없어 거의 개인과외받듯이 학원을 다녔다. 두세 달이 흐르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엉망으로 길들여진 자세가 단기간에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은 피아노를 정공법으로 가르치지 않고 아이가 좋아하는 곡을 중심에 놓고 조금씩 배워야 할 것을 끼어놓으며 지도하셨다. 집에서 스스로 피아노 앞에 앉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아들이 음악을 즐기기 시작했구나 싶어서 너무 기뻤다.

음악이 주는 풍요로움 덕분에 아들의 예민했던 정서가 점점 안정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선순환의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하다

가시를 세워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고 그게 반복되면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더 웅크린다. 아들은 혼자가 편하다고 했지만 세상에 혼자가 편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날을 세우고 아닌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표면적으로 큰 변화가 없으니 잘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 표가 안 나는 게 당연해

그런데 생각해보면 돌던 톱니바퀴를 반대방향으로 돌리려면 많은 힘이 필요하다. 멈추는데도 힘이 들거니와 반대로 돌려도 처음부터 바퀴가 쌩쌩 돌아가지 않는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일정한 힘을 계속 가해야 한다. 항아리에 물을 쏟아부어도 물이 가득 차기 전에는 넘치지 않는 것처럼. 인풋을 일정량 이상 쏟아부어 가득 차야  아웃풋이 나오는 이치와 같다고 할까.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아들에게서 분명 예전과는 다른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씩 속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피아노를 배우고 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며 수업시간에 집중을 하니 수업이 즐거워졌다. 친구들과 두루두루 어울리기 시작했다. 친구들 중 행동이 괜찮거나 성적이 좋은 친구들을 마음속으로 멘토로 정하고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수학 문제를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한 번씩 하향곡선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습해진 안 좋은 습관은  뿌리가 몹시 질기고 단단했다. 공부를 하겠다고 일찍 일어나서 핸드폰을 하다 학교에 가기도 하고 시험기간에 하는 공부는 진득하지 않았고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주도성이 배움에 얼마나 중요한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스스로 쌓아가는 것들이 결국은 아들의 뿌리가 될 것이었다.  



메마른 땅에 자존감이 자란다

자존감이란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메마른 아이의 대지에 자존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자존감에는 세 가지의 영역이 존재하는 데 바로 능력감, 소속감, 가치감이다. 능력감은 개인 능력에 대한 확신이나 신념을 말한다. 가치감은 절대적 가치와 존엄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일을 말한다. 자존감이 높으려면 세 가지 영역이 골고루 좋아져야 한다. 그중 비대하게 한 영역만 크면 구멍이 생긴다.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안다. 주변이 변해 내가 바뀌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해야 주변이 바뀐다는 것을 말이다. 시작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움직임으로서 주변도 에너지 파장에 맞춰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아들은 학급 일에 열심히 참여하며 소속감이 생겼다.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고 피아노를 배우며 성취감과 능력감, 자신감이 높아진 것 같다.


오늘도 아들은 새벽에 방을 비웠다. 어제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공부하는 것만큼 쉼이 중요하니 30분이라도 온전히 휴식을 취해보라고 말했지만 흘려듣는다. 지쳐서 쓰러져 자는 것과 휴식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환경을 만들고 쉬는 것은 다르다. 지금 아들을 보니 능력감과 자신감이 커지고 있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 같다.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어쭙잖게 조언이라는 것을 하지만 스스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으니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거다. 아무리 좋은 떡도 내가 손을 집어 먹어야 맛을 느끼는 법이니까.

남들에게는 웃으며 말도 잘하면서 엄마에게는 사춘기 까칠함을 작렬하는 아들을 보며 아, 이제 이 아이는 내 손을 떠났구나를 실감한다. 나는 최대한 응원만 하는 관찰자로서 아들을 바라봐 줘야겠다. 스스로 경험하고 실패하고 실수하면서 자신만의 세상을  굳건히 만들어가리라 믿는다.


언제나 아이일 것만 한 아들이 사춘기를 맞이한다.

게임만 할 것 같았는데 이성을 좋아하고 고백도 한다.

내 자식은 내가 다 안다고 단언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음을 깨닫는다.


너는 너, 나는 나.

나는 내 세계를 쌓으며 간다.

너는 너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렴.


아들 졸업을 축하한다.

그리고 너의 세계를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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