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지난주 수요일부터 특별한 날이다. <래빗런, 소녀를 부탁해> 폰아트월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15인의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오늘이 더 특별한 이유는 전시회 오픈한 날 참석한 후 일주일 만에 전시회에 상주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서울여성문화회관 6층 뜨락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의 제목은 <래빗런, 소녀를 부탁해>이다. 작가들이 그림으로 성장하고 치유한 스토리를 그림에 담았다. 내 안의 꿈을 가진 소녀와 현재 어려운 환경에 있는 소녀를 응원하고 용기를 주는 전시회이다. 작가들의 작품, 소량의 굿즈 판매액은 전액 <따뜻한 하루> 단체에 기부할 예정이다.
오늘 꽃보다 아름다운 시니어분들을 만났다. 갤러리는 카페와 함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인데 노인복지 프로그램이 많은 센터이기에 카페에 시니어분들이 많으시다.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카페는 복작하니 활발한 기운이 넘친다.
전시회 입구 세팅을 하고 오늘 짝꿍인 리선 작가님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시니어 여성 한 분이 그림 앞에 머물러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가만가만 보시더니 사진도 찍으신다. 전시회 경험이 많은 리선 작가님은 관람객이 혼자 그림을 감상할 여유를 충분히 주고 적절한 타이밍에 옆으로 가서 친절히 작품 설명을 곁들였다.
운명처럼 시니어 여성분이 리선 작가님 그림을 구매하고 싶다고 했다.
"그림이 참 좋네요. 작품 설명서까지 다 넣어 주실 수 있나요?"
작가님은 흔쾌히 다 드리겠다고 했고 원래 그림은 전시회가 끝나고 배송하도록 되어 있으나 바로 갖고 가고 싶다는 말씀에 그 자리에서 포장을 해서 드렸다.
한 자리에서 그 장면을 보고 나니 가슴이 벅차왔다. 내 작품이 아닌데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문화를 즐기고 취향을 드러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과감히 투자한다.
나이 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과감히 살 수 있다니. 말씀도 별로 없는 다소곳한 시니어 여성분이 생각할수록 멋졌다. 아, 닮고 싶다. 나도 나이가 들었을 때 저렇게 취향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림을 사랑하고 선택하는 모습이 내게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꽃보다 시니어. 멋지다.
꽃보다 시니어 두 번째 분은 손주 사랑이 가득한 어르신이다.
5학년 손주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며 손주를 위해 세세하게 그림 그리는 방법, 드로잉 도구 등을 꼼꼼히 물어보셨다.
작품 설명을 하다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가 이어졌고 대화는 인생 이야기로 넓어졌다.
어머, 이야기가 잘 통하네? 말씀도 따뜻하고 상냥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말씀하시기를 서울의 한 외고에서 교육자로(역사 선생님) 오래 계셨다고 했다. 어르신은 며느리, 손자에게도 존대를 한다고 하셨다. 거기서 딱 이 분의 인생이 느껴졌다. 나이 들어 지어진 주름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말해준다고 한다. 내가 쓰는 말 또한 인생을 말해준다. 내가 있는 곳, 장소도 마찬가지다.
어르신은 작품구매는 힘들지만 이야기를 나눈 좋은 시간에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고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사주셨다. 감사하게 받아 리선 작가님과 차를 마시며 떠오른 단어는 '존중'이다. 소소하지만 감사를 표현하는 매너, 어르신의 행동을 통해 배우게 된다.
마침 요즘 읽고 있는 책이 김경일 교수님의 <지혜로운 인간생활>이다. 전시회에 올 때 지하철 안에서 읽었는데 자존감이 적절하게 높은 사람들은 자기만의 문화활동을 한다고 했다.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문화적 활동이 있을 때 자존감이 더 높아진다고 했다. 자신의 일과 관련 없는 문화적 활동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경험을 하면 나 자신에게 감탄하게 된다.
좋은 인간관계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더 건강하게 유지한다.
하버드에서 75년간 진행한, 연구자들이 대를 물려받아서 수행된 장기프로젝트가 있다. 하버드 2학년과 보스턴의 가난한 소년들을 표본집단으로 삼아서 그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와 행복을 장기적으로 추적관찰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행복의 조건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3가지 교훈 (3 Lessons from the reasearch)
1. 사회적 연결은 우리에게 정말로 좋다. 그리고 고독은 반대이다.
2.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자신이 이 관계에 얼마나 헌신적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관계의 질(quality)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50대에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사람들은 80대가 돼서도 가장 건강한 그룹에 들었다.) 긴밀한 관계는 나이를 먹는 고통에서 우리를 다소간 해방시켜 준다. 3. 의지할 수 있는 애착관계가 필요하다. 언제나 사이가 원만할 필요는 없다. 매일같이 싸우더라도, 의지
가 될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사회적 연결이 중요하고 관계의 질과 애착관계가 행복의 조건이라는 뜻이다.
카페의 시니어분들은 모두 최고의 정점을 찍는 리즈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에 따라 그것들은 놓아두는 시점이 되었다. 날고 기었던 성과와 이름, 역할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를 마주하는 시간말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차고 넘칠 것이다. 모든 시니어가 이런 공간으로 오는 건 아니다. 나이 70이 넘어도 부를 더 가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도 있고 고립된 채 기나긴 하루를 버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곳의 어르신들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배울 수 있는 곳,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을 선택하셨으니 말이다.
관계 속에서 배우고 소통하는 시니어, 돈이 없어도 인문학적으로 사고하고 배움을 즐기는 시니어, 고인 물이 되지 않고 긍정적인 시니어, 호기심과 취향을 드러내며 사는 시니어 얼마나 멋진가.
하루종일 전시관에 있으면서 카페에 수많은 분들 중 갤러리에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는 분들은 소수였다. 낯선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기심과 적극성, 문화를 즐기고 '나'를 드러내며 사는 소수의 시니어는 그중에서도 빛난다. 꽃보다 남자가 아니라 꽃보다 시니어다.
3명이 길을 가면 옆의 두 명이 다 스승이라더니 오늘은 멘토를 한 방에 쓰나미처럼 만난 기분이다.
요즘 20~30년 후 내 모습을 조금 더 세세하게 그려보게 된다. 나는 도서관 다니는 할머니, 70이 넘어도 그림 그리고 나누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 꽃보다 멋진 시니어분들을 보며 살고 싶은 모습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