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 비친 노란 해바라기가 눈에 들어온 거야. 길쭉한 꽃잎을 둘러싼 둥그런 수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지. 작은 씨앗들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촘촘히 박혀 있었어.
큼직하고 얇고 부드러운 꽃잎을 만지며 화가는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어.
찰나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단상을 곧 함께 살게 될 동료 화가와 함께 누리고 싶었어.
고독에 익숙해진 화가는 오랜만에 설레었어.
‘절대적인 고독의 공간을 환기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해. 다른 세계의 문을 열 장치가 필요해.’
그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이젤을 세워 거침없이 선을 그었어.
태양처럼 환한 해바라기는 그렇게 태어났어.
화가는 세계와 세계가 충돌해 산산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조각 파편이 서로의 가슴에 박힐지 모른 채 기쁜 마음으로 그림을 벽에 걸었지. 그 뒤에는 아시다시피 고흐와 고갱의 갈등이 심해지고 결국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둘이 결별한 사건으로 마을이 떠들썩했어. 그 이야기가 시간과 함께 흘러 우리가 아는 천재 화가의 유명한 에피소드로 남았지.
이건 한 소녀의 이야기야.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어느 날. 지구 반대편 작은 동양의 나라, 한국의 작은 소도시에 사는 평범한 소녀는 길가에 멈춰 서 고개가 아프도록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새카만 긴 머리는 바람에 흩날리고 손에는 엄마 심부름인 듯 보이는 두부가 든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어. 하늘은 노을이 지기 시작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어. 커다래진 눈은 다른 세계를 탐험하 듯 빛났고 입은 홀린 듯 반쯤 벌어져 있었어.
소녀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어.
“와, 너, 키가… 정말 크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지나갈 수가 없잖아."
소녀의 맞은편에는 둥근 해바라기가 해처럼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서 있는 거야.
" 왜? 무슨 말을 하고 싶니?”
소녀의 눈은 해바라기의 둥글고 큰 수술의 촘촘한 씨앗길을 따라 전진하고 꺾고 돌며 출구를 찾고 있었어. 미로같은 씨앗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어.
출구를 찾는 것을 포기한 소녀는 손을 들어 매끈하고 기다란 타원형의 꽃잎을 만졌어.
해바라기는 큼직큼직하고 선이 분명해서 멀리서도 단연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어.
가까이서 보는 해바라기에서 소녀는 신의 손길을 느꼈어.
섬세하게 드러난 씨앗 마을에 들어가 살고 싶어졌어.
해바라기에 시선을 빼앗긴 건 소녀가 좋아하는 해를 닮았기 때문이야.
이건 해바라기와 해의 이야기야.
뜨겁게 세상을 품는 해를 사모하는 작디작은 해바라기는 자신이 볼품없고 무용하다는 것을 알지만 해를 향한 사모의 마음을 접을 수 없었어. 해는 온 세상을 비추고 돌보며 생명을 탄생시키는 거룩한 일을 했어. 해바라기는 그런 해를 존경했어. 해를 향한 세레나데를 매일 불렀어. 매일 해를 향한 단심가를 불렀지만 해는 해바라기를 무시했어.
키 큰 해바라기보다 작은 다른 꽃들은 자신들과 놀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서운하고 답답했어.
꽃들은 물었어.
“너는 왜 대답도 없고 바라봐주지 않는 해만 보는 거니?”
해바라기는 대답했어.
"상관없어. 내가 해를 좋아하니까."
사실 해는 해바라기가 있는 줄 몰랐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거든.
그렇게 혼자 연모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냐고 꽃들은 비아냥거리기도 했어. 해바라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열혈히 해를 사모했어.
그러던 어느 날 꽃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어. 해바라기의 키가 엄청나게 커져서 하늘을 뚫은 거야. 해바라기의 그리움은 결국 해가 눈치챌 정도로 커진 거지. 그런데 모든 게 해바라기의 노력이라고, 해는 한 게 없다고 착각하면 안 돼. 해는 존재했잖아. 해바라기에게 꿈을 주었잖아. 해는 해바라기의 희망과 목표였잖아. 목 아프게 바라보면서 행복해했잖아. 그것만으로 해는 큰 일을 한 거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이겨낸 해바라기는 해의 숨결을 가까이 들을 수 있게 되었어.
해와 해바라기는 드디어 서로의 얼굴을 보며 행복하게 웃었어.
소녀의 머릿속에 해바라기의 단심가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어.
이렇게 평범한 작은 소녀의 이야기와 전설처럼 내려오는 고흐의 이야기가 만나는 거야.
해바라기의 꽃잎이 유달리 선명하고 윤기 나게 빛나는 어느 날, 해바라기의 소용돌이는 위대한 자연을 느끼게 해.
세계는 붕괴와 재생을 반복한대
모여들고, 폭발하고
흩어지고, 또다시 모여들지
우리가 사는 은하도 45억 년 후에 안드로메다 은하와 합쳐진대.
그러고는 폭발하고 다시 흩어진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는 다시 모여서 다른 별의 재료가 되는 거야.
이 땅의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는 해바라기는 오늘도 방긋방긋 웃으며 해를 바라보고 있어.
해에게 다가가고 있어. 해바라기가 있어서 소녀는 많은 이야기와 접속할 수 있었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감사해.'
소녀는 해바라기를 한 번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는 그제야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가기 시작했어. 발걸음에 행복이 따라오고 있어. 아직 소녀의 마음은 늦장을 부리며 해바라기를 타고 해구경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해가 너울너울 넘어가고 소녀의 뒷모습이 붉게 물들어.
해바라기는 해에게 말을 걸고 고흐와 소녀는 해바라기에 말을 건네지.
이야기를 건네는 세상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어.
오늘 너에게 말을 거는 건 무엇이니?
오늘 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니?
자연의 소용돌이는 은하에도, 태풍에도 생체 분자의 구조에서도 나타나는 생명의 정해진 형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