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여 내게 영감을 주오
덥석 일을 맡겠다 했지만 정해진 소재도, 정확한 기약도 없이 딸랑 노래만 손에 쥔 상태.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자 조금씩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음악을 들었다. 노래는 Seule sur l'Océan(바다 위에 나 홀로)라는 제목의 곡이다. 가사를 보면 바다 위로 가득 차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음악에서 느껴지는 움직임과 분위기, 흐름을 머릿속에 흠뻑 적시기 위해 애썼다. 음악은 따뜻하고 차분하고, 몽글몽글하게 감싸면도 보컬의 힘이 꽉 찬 알맹이처럼 단단하게 곡을 지탱하고 있다. 악기와 목소리는 마치 하나의 몸처럼 이질감 없이 포개져있었다. 나는 새삼 여러 번 들어도 참 좋은 곡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선 그림 스타일은 2009년작 <고래>의 분위기를 따르기로 한다.
뮤지션들이 영상에 대해 요청했던 유일한 부분이기도 했고, 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컬러 없이 흑과 백, 혹은 흑백 사이의 음영으로만 그림들을 표현해야 한다. 사실 나는 컬러를 사용하는데 그리 자신이 없는 편인지라 이렇게 흑백의 느낌만으로 화면을 조율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어둠으로 꽉 찬 화면에 점점이 빛처럼 표현되는 그림의 맛이 재미있기도 하고 은근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차분한 느낌의 음악, 그리고 흑백의 화면. '달'이라는 소재.
나는 가만히 누워 [검은 밤]과, [달]과, [빛]을 머릿속에 더듬어 나갔다.
그리다 문뜩 여러 개의 둥근달이 화면 여기저기 떠오르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달을 '잠'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잠이 든다'를 화면 속 '달이 꺼진다'로 표현하면 어떨까.
동물과 식물들이 각자의 달 안에서 잠을 청한다. 그들이 잠들면, 전구의 불이 꺼지듯 달도 빛을 잃고 검은 화면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즉시 컴퓨터를 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달, 어디 있니?>는 이 그림에서 시작됐다.
생각보다 거창한 시작이 아닌 것이 조금 싱겁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 대부분의 애니메이션들이 하나의 장면, 하나의 낙서,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전개는 아니다. 작은 불꽃같은 동기는 촉매제가 되어 긴 영상으로, 불꽃으로, 번져나간다. 나는 그 작은 불꽃을 따라 정신없이 뛰어가는 여정이 즐겁다. 아마 이러한 즐거움에 중독된 덕에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좀 더 발전시켜 나갔다.
침대 위에 누운 어떤 꼬맹이를 상상해본다. 잘 시간이 되어 억지로 눕긴 했지만 영 잠이 오지 않는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더 갖고 놀고도 싶고, 침대 위에서 콩콩거리며 뛰고도 싶다. 이불 속에 들어가 초를 밝히고 모험가 흉내를 내고 싶기도 하다. 집 안팎으로 하나 둘 불이 꺼지며 어둠이 쌓여가지만, 꼬마의 마음속 불은 되려 환하게 반짝일 뿐이다. 그때, 꼬마 눈앞에 불쑥 누군가 나타났다!
"누구"가 누굴까?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데 도무지 이 '누구'를 어떤 소재로 삼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둥실 거리며 날아다닐 수 있어야 하고, 매끈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기웃거려야 한다. 꼬마와 함께 어디든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는 존재... 그런데 도대체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편안하게 그릴 수 있는 대상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낸 소재가 바로,
물고기.
나는 물방울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 물고기를 영상의 소재로 자주 그렸다. 매끈하면서 날렵함이 살아있는 곡선. 각진 데 없는 둥근 몸. 어느 풍경에 올려두어도 무리 없이 섞일 수 있는 무해함. 화면 안에서 탄탄하게 펄떡대다가도 곧 물처럼 바람처럼 부침 없는 자연의 모습으로 녹아드는 경쾌함. 나는 그를 참 여러 각도로 그려왔다.
러프하게 그린 아트워크 이미지들을 곧장 뮤지션들에게 보냈다. 뮤지션들은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메인 줄거리와 기본 아트워크의 토대가 마련되면서 작업은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