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캐릭터 만들기: 꼬마와 물고기

그리고옛날이야기를덧붙인,

by BAEK Miyoung

종종 처음 이 장르에 푹 빠져들게 됐던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05학번으로 계원예대 애니메이션과에 입학했던 그때, 나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본 배경 지식이 1도 없는 상태였다. 솔직히 출판 만화가가 되고 싶어 선택했던 게 애니메이션과였는데(tmi_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 학과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계원 애니과는 진골 애니메이션 감독을 양성하는 과였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닫고 몇 달간은 멘붕이었다. 그러다 하나 둘 떠밀리듯 들은 수업을 통해 '움직이는 그림'에 대해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때는 애니메이팅 테스트, '라인테스트'를 위해서 '런치박스'라는 기기를 썼다. 아마 우리 세대 이후의 전공자들, 비전공자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기기일 것이다.

애니메이션 런치박스. 이게 지금은 유물 취급받겠지만 그때는 한대 장만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하필 런치박스란 이름일까 궁리 없이 부르곤 했는데 지금 살펴보니 아마 도시락 가방처럼 생겨서 런치박스인 모양이다.

학교에 입학하고 첫 오리엔테이션 날, 선배로부터 런치박스 사용법에 대해 배운다. (그래야만 과제를 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런치박스는 간단하게 이미지 캡쳐 기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런치박스 옆에 웹캠과 같은 저화질의 카메라가 설치되어있고, 카메라 아래에 그림들을 놓고 촬영할 수 있도록 세팅되어 있다. 런치박스 기계 버튼을 눌러 한 장 한 장 이미지 캡쳐를 한다. 캡쳐된 화면들을 앞뒤로 돌려가며 프레임을 늘리거나 줄이는 방식으로 완급을 조절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을 VHS 비디오에 녹화한다.

el-ultimo-vhs.jpg VHS 비디오테이프와 재생 기기. 오늘 계속 등장하는 유물들.

녹화한 VHS 테이프들을 교수님 테이블에 제출한다. 수업 직전이 되면 VHS 테이프가 산처럼 쌓여있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수업 내내 그렇게 VHS에 녹화된 애니메이팅 영상을 살펴보면서 보완할 부분과 잘 된 부분에 대해 논의한다.

당시 짧은 기간동안 데이터 저장 매체는 급격하게 변화했는데, 3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과제를 제출하는 방식이 VHS 테이프 녹화 -> CD 제출 -> USB 저장 후 데이터로 제출하기로 변화했다. 다들 USB로 과제를 제출하고 있을 때 어색하게 CD를 들고 방황하던 복학생 오빠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화면 속 내가 그린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는 움직인다. 일련의 동작으로 연결된 여러 장의 그림들을 빠른 속도로 보여주면, 눈은 낱장의 그림들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이 아닌 연속된 동작으로 읽기 시작한다. 애니메이션은 어찌보면 착시로 인한 환상 같은 것이다. 화면 속 걷고 뛰고 움직이는 것을 보며 마음속 가득 환희가 차올랐다. 그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화면에 숨을 불어넣는 일. 작은 모니터 속을 누비는 그림들의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림으로 움직이기 좋은 것이라면 역시 가장 좋은 건 동물이다. 그 덕에 내가 만든 애니메이션 안에서는 별 꿍꿍이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많은 동물들이 등장하곤 한다.(식물 사물 포함) 사람을 그리는 건 암만 잘 쳐줘도 동물(식물 포함) 그다음인데, 정 그려야 한다면 어린 사람을 그리는 게 좋다. 등신 비율은 3~5등신. 큰 얼굴에 동그란 몸에 팔다리도 짤막하니 귀엽다. 화면 속에서 진지하지 않아도 그럴싸하다. 긴 팔과 다리를 가진 인물을 그리는 건 어쩐지 심하게 진지해지는 일이 되어버릴 때가 많다. 역시 사람을 그리려거든 어린 사람을 그리도록 하자.


2013년 작 <너무 소중했던, 당신> 에 주요 캐릭터는 두 마리의 토끼와 한복을 입은 동자이다. 그때도 나는 밤과 달을 떠올리며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 보면 달과 밤이라는 소재는 오랜 기간 수많은 작가들에게 무궁무진한 영감을 주는 소재다.

04 사본'.jpg 동자와 토끼들. 한복 저고리 고름 그리느라 식겁했던 기억이 난다.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의 역할이란 결국 관객의 감정과 눈을 뜻한다. 화면을 보는 이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존재. 한편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는 감독의 '주연 배우'이기도 하다. 실사 영화감독들이 심혈을 기울여 주요 배우들을 캐스팅하듯, 애니메이션 감독들도 내가 만든 화면 속에 던져져 종과 횡으로 움직일 '캐릭터'를 어떻게 그려낼지 오랜 기간 고심한다. 만들어진 캐릭터는 전체 화면의 색과 톤을 좌우하는 주요한 Key가 된다. 캐릭터가 담기는 공간, 공간에 배치될 사물, 캐릭터와 어울리는 색깔- 캐릭터는 애니메이션 속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기획 단계에서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것은 꽤나 부담이 되는 결정이다.


<달, 어디 있니>는 조금 달랐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내 마음속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그리고 싶은 것을,

-편안하게,

-스트레스 없이 그릴 수 있도록 할 것.

따라서, 이야기도 캐릭터도 프로젝트 무게에 비해서는 그리 큰 고민 없이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 깊은 메시지나 교훈을 담아내고 싶지 않았다.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싶은 마음뿐. 그렇게 상상 속 세상을 천연덕스럽게 누비고 다니는 천진난만한 '꼬마'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6~7살 아이를 생각하며 캐릭터를 디자인했다. 성별은 상관없다. 아직 몸이 영글지 않아 하는 행동마다 서투름이 묻어나는 작은 아이. 그런 느낌이면 좋을 것 같다 생각했다.

boy2.jpg 꼬마 캐릭터

잠들기 직전이니 입고 있는 옷은 잠옷이 돼야 한다. 귀여움을 추가하기 위해 모자가 달린 잠옷으로 디자인했다. 모자를 벗었을 때 '꼬불이 파마머리'가 드러난다는 반전도 추가했다. 통 잠옷만 그리기엔 약간 허전하니, 짧은 카디건도 입혔다. 그렇게 메인 캐릭터가 완성됐다.


이제 함께 화면을 누비고 다닐 물고기와 꼬마를 나란하게 세워봐야 했다. 이 둘을 어떤 느낌으로 접목시킬지 여러 궁리를 했다. 물고기의 형태는 최대한 단순하고 무난하게 그렸기에 아이와 나란히 뒀을때 크게 튀지 않았다. 이제 이 둘을 어느 정도 비율차를 두고 그려야 할 지, 직접 그려보면서 테스트해 보았다.

boyP.jpg
boyP2.jpg
물고기 크기가 이만해야하나...? 아님 좀 더 크게?;

꼬마가 물고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을 화면에 꼭 넣고 싶었다. 처음에는 물고기와 꼬마의 크기가 별 차이 없도록 설정하려 했지만, 꼬마를 너끈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도록 물고기와 꼬마의 비율을 1:7 정도로 설정했다. 아이의 작은 몸이 부각되는 동시에, 현실에 없는 큰 물고기를 화면에 유영시켜 꿈같은 풍경이 그려지길 바랐다.

캐릭터 바리에이션(응용 동작)

아이 그림을 그릴 때마다 기분이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만난 지(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치 몇 년은 알고 지낸 듯 손가락 사이사이로 물이 흐르듯 그림이 흘러나왔다. 아마 내 손 저 어딘가에 숨어있다 나타난 모양이었다.


이야기와 캐릭터가 모습을 갖춰지면서, 이들의 무대가 될 [공간]을 어떻게 설계할지 정해야 한다.

즐거운 상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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