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단상

이 글은 언제 다 쓸 수 있을까 염려하며 쓰는 글

by BAEK Miyoung

아기는 무럭무럭 자란다.

남의 집 아기는 금방 크는 것 같다는 말을 심심찮게 했다. 그게 내 아이의 경우도(물론, 너무나도 육아가 힘들다 하더라도) 비슷하다는 게 새삼 재미있다. 어느덧 4개월을 코앞에 둔 아기는 손 닿기도 애처로웠던 신생아 딱지를 뗀 지는 한참이고 벌써 품 안을 묵직하게 파고드는 8kg의, 뽀얀 피부와 빨간 뺨이 매력적인 평범한 '아기'의 모습이 되었다.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신생아 시절은 전생이고, 배가 불룩하게 임신했던 기간은 전전생 같은 느낌이 들만큼 아주 짧은 과거도 순식간에 먼 어느 순간으로 가버린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과거 어느 때쯤을 잠깐 상기할 틈도 없이 현실을 쫓아가기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아기는 여러모로 참 신묘한 존재이지만, 무엇보다 부모에게 아주 뚜렷하게 '현재'에 발을 붙이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기가 존재함으로써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그저 열심히 살아내는데 집중한다. 예상할 수 없는 이다음의 시간도 별일 없기만을 바라며 느긋한 마음으로 아기의 다음 스텝을 기다릴 뿐이다.


내 삶에서 2025년만큼 단순한 키워드로 대체되는 해는 없을 것이다.

[임신]과 [출산]

이 두 단어가 한 해 동안 내 모든 순간을 잠식해 버렸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내용의 두 단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개인적인 의미를 다 풀어내자면 한도 끝도 없다. 장담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내 인생에 이만한 큰 영향을 주었고 또 줄 사건은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2025년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해로 내 삶 언저리에 머물거라 생각하면 때때로 뭉클해진다.


출산 이후에도 아주 자주 글을 쓰고 싶었다. 남기고 싶은 말도 머무르게 두고 싶은 감정들도 많았지만, 예상대로 출산 후 이렇다 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아, 물론 아기가 6~70일이 될 때까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전혀 없었다. 레알.) 바쁜 육아 중에도 종종 '틈'이라는 것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틈'이 감정적인 여유로 이어지지는 못해서 아주 사소한 창작이라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신이 늘 바닥까지 지쳐있었기에 나는 대부분의 '틈'을 별스럽지 않은 무심한 일들로 채웠다. 어떨 때는 그런 안일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대체로 죄책감은 금세 잊혔다. 이렇게라도 빈 공간을 만들어두지 않는다면 바싹 말라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다만 몇 가지 적고 싶은 말들을 두서없이 남겨본다. 훌훌 떠난 2025년과 느닷없이 다가와버린 2026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1. 은중과 상연

오랜만에 시리즈물을 제대로 각 잡고 봤다. 마음의 여유 탓인지, 아니면 요즘 나오는 영상물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탓인지 영화나 시리즈물을 깊이 몰입해서 본 기억이 저어기 기억 끝자락 어디쯤에 있다. 그러던 중 넷플릭스에서 [은중과 상연]을 보았다. [은중과 상연]은 내가 마지막으로 제대로 본, 그러니까 조리원에서 몸도 마음도 아주 편안하게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시리즈물이었다. 산후 조리원에서의 일과는 비슷한 듯 다양하다. 좀 더 '엄마 준비 모드'로 가야 할지, 아니면 가까운 미래를 대비해 '대책 없는 휴식 모드'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여성분들이 많다. 나도 그러했다. 아무리 신생아 케어에 일가견 있는 프로들이 내 아이를 24시간 책임지고 돌보아준다 하더라도 '엄마'된 입장에서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이 내심 죄스러울 때가 많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그런 '눈치'라는 것을 보게 된다. 새삼 여성의 삶이 고달픈 건 여성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지나치게 몰입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방금 들었다. 어쨌든, 나도 조리원에서 짧게나마 성실하게 아기를 돌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조리원 나가면 드라마 한 편 볼 시간 없다는 둘째 엄마들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시리즈가 바로 이 시리즈였다. 나는 여성 서사물이 주가 되는 콘텐츠를 잘 보는 편이 아니다. 그 안에 그려진 내용이 지나치게 여성을 성역화하거나, 이성적인 척하다가도 결국 감정적으로 이야기가 귀결되거나, 아주 단편적인 관계들로 빚어내는 비슷한 결의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고, 사실을 막론하고 나름의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여성'이기에 해당 서사에 지나치게 감정을 쏟게 되는 경우를 회피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은중과 상연] 시리즈는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게 보았다. 이야기를 담아내는 속도는 꽤나 슴슴했지만 감정의 깊이는 깊고 넓어 생각할 수 있는 진폭이 컸다. 인물들의 본연의 심지가 성숙해지되 꺾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두 여성 중 착한 여성이 결국 왕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훗훗 식으로 끝나지 않는 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두 인물의 관계로 시작해서 관계로 끝나는 점도, 두 여성의 서사가 다면적이면서도 여성이라면 동감할 수 있는 지점이 아주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도 좋았다.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나조차도 아직 여성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를 때가 많다. 질투와 사랑과 열망과 열등감, 그리고 알 수 없는 파괴 본능이 고개를 쳐드는 그 요상한 정신세계를, 그러다가도 다 포용하고 싶은 이상한 그 심리를 담담한 톤으로 담아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시리즈를 끝까지 다 본 후, 나는 영상과 관련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긴 글 한편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지난 10월에 쓰기 시작한 글을 여태 완성하지 못했다. 아마도 완성까지 다다르지 못할 것 같기에 이렇게 토막글이라도 남겨본다. 아, 두 여성 연기자의 연기도 정말 좋았다. [상연] 캐릭터는 자칫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캐릭터로 보일 수 있는 상황이 정말 많았음에도 연기로 기가 막히게 설득이 되었다. 두 배우의 다음 연기가 무척 기대가 된다.


2. 프랑스 주택보조금 제도, 알로까시옹[Allocation] 폐지를 보면서

지난주쯤 해당 내용을 기사로 접했다. 국적을 막론하고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지급해 주던 주택보조금, 즉 알로까시옹 제도를 올 7월부터 폐지한다고 한다. 이유는 프랑스 재정의 악화 탓이라 했다. 알로까시옹은 대부분 월세 계약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자국 학생 및 유학생들에게 일정 주거비를 '현금'으로 지원해 주는 제도이다. 해당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말 그대로 통장에 현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수입이 없는 유학생들에게는 각박한 해외 생활에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언덕쯤으로 여겨지던 제도였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에게는 날벼락일지 몰라도, 해당 기사를 접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저런 갸륵한 제도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이익을 위한 프랑스 정부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나는 여러모로 내 유학 시절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유학을 갔던 2008년이다. 대학 입학 후, 그리고 대학을 마친 이후에도 수입이 없는 작가라는 이유로 알로까시옹 혜택을 누렸다. 주거비가 악랄하기로 소문난 파리가 아닌 지방 어디쯤에서 유학한 덕에 주거비가 아주 부담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한 달 월세 약 50만원 중 절반 이상은 알로까시옹으로 커버가 가능했으니 호화로운 유학 생활은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쪼들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의 나는 그 제도가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대학 입학하니 해당 제도를 신청하라 했고 순순히 돈을 주기에 꼬박꼬박 달달하게 받아 썼다. 내가 유학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제도라 그리 특별하다 생각지도 않았다. 프랑스를 떠나고 긴 시간이 흘러 해당 제도가 폐지된다는 기사를 마주하며 여러 심경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 학생에게 그런 식의 호의를 베풀어 준 프랑스 정부가 새삼 놀랍고 감사했다. 그런 식의 복지를 이어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기회는 국적을 막론하고 공평해야만 한다는 정의가 프랑스 사회에 녹아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면으로는 자신들이 아직 건재하고 부유하며 없는 이들을 재량껏 돌볼 여력이 있음을 자신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떠올려보면 내가 유학하던 때만 하더라도 서유럽=열강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그들도 그러한 사람들의 시선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프랑스에 한 수 배우고자 온 유학생들은 그들의 호의를 별 뜻 없이 받았다. 이제 시대의 흐름이 확실히 바뀌었음을 느낀다. 내가 유학하던 때만 하더라도 한국은 북한이 근접해 있는 꽤나 위험한 나라로 회자되는 나라였다. 한국은 더 이상 동양 어디쯤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먹히는 브랜드가 되었다. 모두가 그리된 건 아니라 해도 대체적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가세가 기울어 대대로 시행하던 '자비로운 제도'를 더 이상 이어할 수 없는 프랑스의 현 상황을 보면서 나는 낡은 격세지감을 느낀다.


3. 임신 후 맞이한 변화들

엄마가 된다는 기분, 을 거창한 표현까지 써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찌 되었건 '엄마'라는 역할이 생겨난 건 한 인간의 일생에 엄청난 변화이자 충격을 가져다준다. 출산 후 생각보다 몸이 힘든 건 버틸만했다. 물론 아기의 신생아 시절부터 얼마간은, 2시간도 이어 잘 수 없어 말도 못 하게 괴로웠다. 그럼에도 아이는 정말 예쁘다. 울면 우는 대로, 먹으면 먹는 대로 예쁘고 귀하다.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은 단 하나의 이점이라면 시간의 유한함을 어느 정도 체득한 시점에 아이를 만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이러한 지혜는 힘든 때가 마냥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또한 소중한 순간은 찰나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준다. 육아의 문제는 실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지쳤을 때 온다. 마음이 지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일단은 아이가 내 인생에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제 일 순위로 소중해지는 탓이 크다. 소중함=사랑으로 몽글몽글하게 표현하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잃을까 다칠까 소홀해질까, 일종의 '두려움'에 더 가까운 감정이라 하는 게 맞겠다. 소중하기에 매분 매초 두렵다. 거기에 온 신경과 마음을 집중하느라 다른 곳을 돌볼 여력이 전혀 남아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남편과의 관계 변화에서 오는 스트레스 역시 엄청나다. 느지막이 결혼한 우리 둘은 여태 크게 다툴 일이 없이 지내왔다. 서로의 영역이 확고했기에 적당한 선을 존중하기만 하면 다툴 일이 없었다. 집안 살림의 경우, 솔직히 내가 더하는 상황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조차도 수용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를 보호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늘어난 역할은 [부모 1] 하나라지만 그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카테고리별 업무가 쓰나미처럼 쏟아져 내렸다. 늘어난 살림, 줄어든 수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작은 인간과의 일상은 재빠르게 부부의 평온함을 집어삼켰다. 우리는 처음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원색적으로 싸움이라는 것을 했다.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힐난했다. '아이'라는 공동의 과업이 생기면서 서로 존중해 마지않던 일종의 선이 무너졌고 상대방이 하는 꼴이 못마땅하고 못 미더운 경우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속출했다. 대체로 [엄마]라는 역할에 숨차듯이 내달리는 나와, [남편]에서 [아빠] 역으로 덤덤하게 진화하는 남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신경전들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변화한 몸과 날뛰는 호르몬, 자주 전원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뇌와 진화가 덜 된 남편, 미치게 귀여운 아기 사이에서 나는 아직도 고군분투 중이다.


4. 아기

얼마 전 육아 중인 프랑스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다.

"육아하는 심정이 어때?"라 묻기에 나는 답했다.

"매 순간이 [지나치다].

, 지나치게 귀엽고

, 지나치게 행복하고

, 지나치게... 피로하다"라고.

아기는 신기하다. 평생 한 방향으로만 흐르던 시간의 개념을 날름 바꾸어 놓는다. 시간을 잘게 부수기도, 모았다 팽창시키기거나, 역행시키거나, 알 수 없는 먼 미래로 데려다 놓아 아직 겪지도 않은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심술궂은 마법을 부린다. 그러한 탓인지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시간 개념이 옅어지면서 그저 아기가 먹고 싸고 자는 현실을 다급하게 따라다니기만 했다. 그 사이 이런저런 두서없는 생각들이 심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 인류에 대하여, 이토록 24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새끼를 오랜 기간 몸과 시간을 갈아내어 키워낸 역사 속 수많은 엄마와 아빠들을 생각했다. 아기는 무력하다. 또한 세상 무해하다. 태어나 100일이 지나도록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고개를 가까스로 지탱하는 일 정도다. 그러니 아기는 미우나 고우나 자기 옆에 머무는 인간의 인간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 아기는 때때로 마치 나비 날갯짓 같은 아귀힘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곤 했다. 하찮게 작은 손에 무게감이라곤 거의 없다. 이 작은 무게를 뺀 세상의 모든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막막함을 마주할 적이면 나는 속절없이 눈물이 났다. 부모가 자식에게 향하는 애정의 근원은 무엇일까. 내가 사랑하는 이를 닮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애처로움이 애정 앞에 놓인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순수하기보다 편협한 파렴치한의 얼굴을 더 닮아있다.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리만큼 파괴적인, 비이성적인 애정이다. 한편으로는 내 아이의 귀함은 세상 모든 아이를 귀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아기를 안고 재우던 어느 밤, 베이비 박스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이 불쑥 눈에 들어왔다. 아마 알고리즘의 농간이었겠지만, 마음이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도 영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영상 속 어느 날은 추운 겨울밤이었다.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새빨간 얼굴의 신생아가 그날 밤 베이비 박스에 들어왔다. 모자이크 너머 아직 빨간 아기의 얼굴이, 마주 보는 이 없이 전동 바운서에 앉아 위로 아래로 흔들리는 아기들의 모습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안다. 나는 그 길로 아기 이름으로 매달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를 시작했다. 세상 모든 아기들이 따뜻한 품 안에서 잠들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세상 모든 아기들이 뽀얀 살이 올라와 포동포동해질 때까지 오래도록 사랑하는 이의 시선 아래에 놓일 수 있기를 바란다.


예상했던 대로 이 글을 다 쓰기까지 3일 정도 소요된 것 같다. 나름 선방했다. 2026년에는 20년간 10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작업했던 기록과 기억을 모아 긴 글을 연재하려 한다. 연재할 수 있다면 말이다. 모두가 2025년보다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더 사 먹을 만큼만 더 행복해지길 바라며, 뒤늦은 새해를 맞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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