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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Sep 13. 2015

단편 <너무 소중했던, 당신> 작업기_#16(1)

마침표. 그리고-

영상 작업이 끝나고 예전 프롤로그 파트의 음악을 담당했던 Timothee가 사운드 후반 작업을 도맡았다. 20분짜리 영상의 전체 사운드를 감독하는 것이 경험이 적은 Tim에게는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는데 다행히 내가 건넨 티져 영상에 냉큼 낚여줬다.(ㅎㅎ...티져는 낚기 위해 만드는 거지.)


<너무 소중했던, 당신>티져영상_https://www.youtube.com/watch?v=kbNnA3KC_4Q


 한 달로 잡았던 작업 기간이 두 달로 미뤄지고 그 사이 서로 날 선 대립각을 세우며 의견을  주고받기를 몇 번. 다행히 무사히 사운드 작업이 끝났다.


휴... 


2013년 4월 5일

Tim에게서 최종 사운드 작업 OK사인을 보내고 프로젝트는 최종 마무리가 됐다.


진짜 이 프로젝트가 끝난 것이다.

<너무 소중했던, 당신>의 공식 포스터
끝나자마자 기념으로 한정판(?) DVD를 만들었다. 20장쯤? 대부분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자-

할 말이 태산처럼 많을 줄 알았는데 당장은 이 프로젝트를 위한 얘기는 잠시 접은 페이지로 두기로 했다.

원래 이별의 순간보다 시간이 지난 후 그때를 더 아련히 추억하듯, 이 순간 역시 그러하리라 짐작했었다. 


또 감상에 빠져 지내기에는  이것저것 할 일들이 많았다.

우선 <너.소.당>애니메이션의 배급을 맡기로 한 프랑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La Fabrique'과 배급 관련 계약을 최종  마무리해야 했고, 한국에 있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참여를 위해 일정도 다시 조율해야 했다. <너.소.당>은 2012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주최한 '피치 앤 캐치' 프로그램 지원 선정작이었다. 작업비 일부를 지원받음과 동시에 2013년 개최될 여성영화제에서 완성된 영상을 최초 상영하기로 결정되어있었다. 한국에 다녀오면 이제 유학을 정리하고 귀국 수순을 밟아야 했다. 5년간 살았던 집과 2년간 오갔던 작업실도 정리해야 하고 그 사이 프랑스로 여행을 온다는 가족들을 위한 여행 준비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여기 이 멋진 프랑스에서 보낼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작업하느라 아껴뒀던 산책을 자주 나갔다. 앙굴렘은 그리 볼 것 없는 작은 도시지만 어디든 눈을 크게 뜨고 꼼꼼히 살피다 보면 예쁘고 신선하지 않은 도시는 없다. 날 좋은 날 잔잔한 바람이 부는 강가로 산책을 나가면 햇빛으로 반짝대던 강과 짙푸른 하늘.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는 나무들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풀과 나무 냄새를 머금은 녹색빛 공기는 덤. 나는 소란스럽지 않은 조용함, 화려하지 않은 그 소박함이 참 좋았었다. 

강가의 백조. 앙굴렘에서는 생각보다 흔히 볼 수 있는 생명체였다.
산책 중 만난 백조랑 한컷.
붉은 회색빛 지붕의 앙굴렘

 버스를 타고 근교로 여행도 다녔다. 파리나, 리옹같이 큰 도시들은 아니지만 앙굴렘에서 버스나 기차로 1~2시간 내로 갈 수 있는 Cognac이나 Saintes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들을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는 것도 신선한 나들이였다. 비용도 적게 들고 무엇보다 그리로 관광가는 이들이 거의 없으니 어딜 가나 한적한 것이 장점. 술은 먹지 않지만 Cognac(꼬냑)에 가서 술 한병 사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5월. 여성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다녀왔다.

 기대했던 영화제에서의 첫 상영. 그러나 사운드에서 큰 문제가 발견됐다. 우리 측도 영화제 측도 미리 발견하고 조정할 틈 없이 벌어진 일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당장 두번째 상영이 코앞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무척 괴로웠다. 또한 2012년 제1회 단편 애니메이션 공모 이후, 더 이상 '피치 앤 캐치' 프로그램에서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은 지원하지 않고 있다. <너무 소중했던, 당신>이후의 지원작이 없어진 상황에서 2013년 영화제에 맞춰 월드 프리미엄 상영을 한 것이 생각보다 무의미하게 지나가 버렸다. 더 이상 이 분야의 공모를 받지 않는 것이 영화제의 취지와 맞지 않았던 탓이겠지만, 내가 뭔가 잘 이끌어나가지 못한 탓에 발생한 일이 아닐까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오랜 기간 이때를 위해 달려왔고 처음 관객들과의 만남을 고대했던 행사지만, 아쉬움과 섭섭함이 가득한 행사로 마음속에 남아있다. 

애니메이션 전문잡지'애니메이툰'에 실린 <너무 소중했던, 당신>의 영화제 지원 선정과 관련한 내용.
영화제가 열린 신촌 메가박스.
영화 상영 시간 안내 팻말 속 <너.소.당>


 

 한국에 다녀온 후, 오랜만에 들린 아뜰리에에서 신기한걸 목격한다.  


 열쇠로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가에서 웬 비둘기 한 마리가 나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평소 같으면 날아갔을 비둘기가 가만 앉아 있는 게 범상치가 않아 창가로 다가갔는데..

?너 거기서 뭐해?
ㅇㅁㅇ!! 헐. 이것은 레알, Egg!!!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작업실 창틀에 둥지를 틀었다. 내 애니메이션 말미에도 알을 품은 비둘기가 등장하는데... 이런 신기한 우연이 있다니!


한동안 비둘기가 새끼 보살피는데 전념하도록 가급적 작업실 출입은 삼갔다. 그러다가도 종종 작업실을 들러야 하긴 했는데, 어느 날 운 좋게도 알에서 막 태어난 새끼 비둘기를 목격할 수 있었다.

끄아!!

이후에도 이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는걸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새끼 비둘기가 그리..엄..호감있게 생기지 않았음은 이미 고등학교 때 비둘기 둥지를 목격한 후 익히 알고 있었지만-역시나 비둘기는 어른 비둘기(?)일 때가 제일 예쁘다.

진짜로..

안뇽. 난 새끼 비둘기!
뭔가..뭔가 중간 단계라는건 알겠는데 언발란스하다.
몸을 보면 어른 비둘기같은 털이 점차 자리잡고 있는걸 알 수 있다. 머리에는 아직 어릴적 노란털이..
짠. 다 컸다!!

얼마 후 찾아간 아뜰리에에 더 이상 비둘기는 없었다. 다 커서 하늘로 훨훨 날아간 것이다. 생명의 신비함이란..


 10월. La maison des auteurs 에서의 작업실 마감전, 오픈 도어 전시가 있었다. 이곳은 해마다 2~3차례 닫힌 문을 개방해 작가들의 작업실을 무료로 전시. 홍보하는 행사를 연다. 다행히 작업실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이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급조된 라인테스트기와도 안녕~2년간 잘 썼다!!
심플한 작업 전시. 전시회 후 저 판넬도 주변에 다 나눠줬다.


작업실 정리 후, 5년간 살았던 아파트와도 이별을 고했다.

워낙 별 살림살이가 없기도 했지만, 버리기 아까운 가구는 중고 거래를 통해 팔거나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식으로 물건을 정리했다. 문제는 책과 작화지였는데... 몇 년간 그리고 쌓아놓은 작화지가 몇만 장이었다. 그것을 추리고 추려내도 몇천 장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그 그림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 귀국하기 몇 달 전부터 차근차근 한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집에서는 내가 보낸 작화지들을 정리하느라 어머니가 꽤나 고생을 하셨다고...

짠. 작화지 보내요~ 뿌잉뿌잉. (저건 그 중 일부분..)

지금도 저 작화지들은 부산 부모님 댁에서 똥덩어리 취급받으며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내 유학생활의 발자국이자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흔적인 이 그림들은 내게 소중한 보물과도 마찬가지다.


 닦아도 티 나지 않던 오래된 나무 바닥. 창을 닫아두면 어디선가 스물스물 올라오던 아리송한 냄새. 볕은 안 들지만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창문. 현관으로 들어와 가장 안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1층 모서리의 집. 내 방.

아직도 그 구석진 방에서 '앙굴렘의 나'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만 같다. 

창밖으로 보이던 아름다운 하늘의 풍경. 너는 내 하늘이고 위로였단다.


 10월 중순, 등과 손에 짐을 한가득 이고지고 5년간 살았던 앙굴렘을 떠나 파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다이어리를 펴고 글을 쓰려고 보니 또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항상 중요한 순간에 글이 안 써지는 걸까. 창밖으로 멀어지는 앙굴렘을 바라보며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저 낡고 바랜 도시는 그 자리 그대로 머물러 있으리라는 안도감과 함께 손에 들었던 펜을 놓았다.



*다음 단편 <너무 소중했던, 당신> 작업기_#16 (2)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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