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리셋

여러 이별 후, 다시 <바람>

by BAEK Miyoung

다시 이 프로젝트를 꺼내 들게 된 건 <너무 소중했던, 당신>을 마무리 한 그 해 여름.

프랑스 앙굴렘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을 이제 막 떠나보내고 있었다.

IMG_4838.JPG 앙굴렘 도시를 관통해 흐르는 Charente강. 여름에 그 물빛이 더 아름답다.

2년 넘도록 길게 이어진 프로젝트를 끝내며- 한동안은 그저 요양하 듯, 바람 불듯 무심히 지내자 했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체질이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새 프로젝트를 위한 새 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그 즈음 영상 제작을 지원해주는 국내외 기관도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우선 팔닥팔닥 살아 날뛰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내 창작의 샘은 2년간 매일 퍼다 나른 덕분에 거의 바닥을 보이다 못해 쩍쩍 바닥이 갈라지고 있었다. 더 건질 것이 없는 샘. 난처했다. 이제 믿을 거라곤 예전에 내가 조금이라도 파릇하고 신선했을때 메모해 둔 아이디어 노트뿐이다.


몇 가지 쓸만한 아이디어들이 있었지만 몇몇 조건에 충족되는 프로젝트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조건 1. 재밌을 것. 아름다운 영상미는 당연.

조건 2. 10분 내의 러닝타임.

조건 3. <너무 소중했던, 당신> 보다 단순한 아트워크


약간 몸을 사렸다고 한들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너무 소중했던, 당신>으로 지배당한 내 마음을 쉬게 하는 동시에 몸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손에 꺼내 들게 된 것이 이 프로젝트, <바람>이었다.


이미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한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쓰는 연필선의 느낌, 색을 쓰는 방법,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관점도 아주 조금씩 조금씩 변해왔을게 분명했다.


다시 처음으로-


이야기를 요리조리 이어 보고 연필과 색을 다시 입혀, 과거의 프로젝트를 '현재의 것'으로 되돌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첫 번째 과정으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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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성향이 짙게 베인 스토리보드다. 전체 영상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떤 이미지로 보일지에 더 신경을 쓰고 그렸다.


보드 작업과 더불어 아트웍 소스도 새로이 작업했다.

여태 그래 왔듯 연필의 느낌을 살리면서 최소한의 컬러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꽃의 화려함이 모노톤의 연필선들로 죽지 않도록, 돋보일 수 있는 중요 컬러를 여러 방향으로 시도했었다.


바람.jpg 영상의 메인이 되는 꽃과 바람, 그리고 흩날리는 듯한 '바람'의 글 역시 하나의 그림처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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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4309.JPG 아트워크 스케치 단계. 이때 찍어 둔 사진이 얼마 없다. 몇 남아있지 않은 사진 중 하나다.
Flower_3.jpg 컬러와 보정 작업을 거친 이미지.


이렇게 프리 프로덕션 단계를 끝내니 여름이 지났다. 어김없이 가을이 왔고 앙굴렘과도 기약 없는 작별을 고했다.

IMG_5356.JPG 아직은 그리운, 앙굴렘의 저 노을.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잠시 들렀던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에서, 프로듀서인 자비에와도 이 <바람> 애니메이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었다. 아트워크와 스토리보드를 엮어 얇은 책자로 만들어 선물로 주고 왔기 때문이다. 자비에는, 이 역시 함께 작업해보지 않겠냐는 얘기를 넌지시 건네주었다. 나도 기껍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즐거운 다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비에가 하늘로 떠나면서- 그리고 프로덕션과의 인연도 더 이어나가기 힘들게 되면서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더불어 귀국 직후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나를 심리적 불안 속에 가둬두게 된다.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시기가 어느 때보다 긴 겨울을 나고 있었다.


아-

이 가엾은 <바람>은 또 얼마간 '나'라는 강력한 중력의 힘을 받지 못한 채 궤도 없이 뱅글뱅글.. 허공을 떠다녀야만 했다. 마음의 벨트를 단단히 조여매고 이 프로젝트를 업고 달리기 시작한 건 또다시 몇 개월 지난 봄 2014년 3월쯤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