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기법 테스트

기법이 뭐죠? 먹는 건가요?

by BAEK Miyoung

2013년 여름에 노렸던 덩치 큰 지원사업은 다른 사람 품에 쏙 안겨버렸다.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절실히 원했던가 자문하면서 서류를 준비했던 터라 그저 담담히 결과를 받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지원사업에 모든 아티스트, 작가들이 통과될 수는 없다. 언제나 '된다/안된다'라는 두 가지 답변 중 대부분은 '안된다'라는 답변을 들을 확률이 높다는 것도 이미 잘 인지하고 있다. 물론 사업을 신청하고 원하는 결과를 받지 못 했을 때 드는 실망감이 눈곱만큼도 없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고 차선책을 준비하는 게 여러 모로 낫다. 이렇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된 것도 사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2014년 초, 부산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창작자 지원사업 '영상'부문에 선정되어 넉넉하지는 않지만 시작하기 나쁘지 않은 지원금을 약속받고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내가 많이 애껴요 부산..)


귀국 후 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당분간'이라는 마음으로 짐을 풀면서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내다보기가 겁이 났던 시기다. 때마침 듣게 된 기분 좋은 성과에 모처럼 기운이 났다. 한동안 새로운 환경에 뿌리내리지 못해 휘청대던 몸과 마음을 덕분에 다부지게 붙잡을 수 있게 됐다. 어떻게 보면 지원사업을 통해 '돈'을 받는 게 그리 중요하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사실 크든 적든 '돈'을 받는다는 것 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태 내가 밟아온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외부세계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더 중요하다. 가끔은 혼자만 내리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지치게 만드니까. 등 두들겨주며 힘내! 를 외쳐주는 존재가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기법.

일반 단편 영화의 그렇겠지만 단편 애니메이션도 일반 극장용 혹은 TV시리즈용 애니메이션에 비해 실험적인 기법들이 많이 시도된다. 이미지 아트워크 자체가 영상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단편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어떤 기법으로 그려내고 촬영하느냐에 따라 영상이 가지게 되는 무게감은 크게 달라진다. 점점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확대되고 영상 구현 기술은 나날이 발전되면서 재밌고 독창적인 기법의 애니메이션들이 많이 보인다.

오목어.jpg 신선한 기법으로 만들어진 김진만 감독님의 작품 '오목어'. 1400인분의 국수가락을 이용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그에 비하면 가장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아날로그 2D기법과 디지털 2D기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나의 경우는 기법 연구가 늘상 어려운 과제다. 가끔은 아무리 열심히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기법적인 부분에서 너무 안일하게 접근한 것 아니냐는 쓴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바람>의 경우는 이런 무거운 마음을 에둘러 떨쳐내고 '가볍게, 하고 싶은 대로 가자' 고 마음먹었던 초반의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여태껏 만든 그 어떤 영상보다도 기법적인 고민을 가장 많이 했다. 이 역시 2D전통적인 기법 내에서의 고민이긴 했지만 1차, 2차 아트워크를 완전히 도려내고 다시 본 작업에 적합한 기법을 풀어내기까지 꽤나 많은 애를 먹어야 했다.


1,2차 아트워크를 접은 후, 100% 디지털 작업을 고려해 그려본 메인 이미지와 테스트 영상이다.

대표이미지.jpg


scene1-1.png


작업 방식이 복잡하지 않고 이미지 자체도 썩 나쁘지 않았지만 어딘지 마음에 콕 박히지 않았다.

저 짧은 분량의 영상을 깨작대며 미묘한 교정을 반복했다. 마음에 차는 부분과 차지 않는 부분이 미묘한 각을 세우며 희망고문을 하길 일주일. 더 이상 정체하기엔 갈 길이 멀었고 이 페이지는 덮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다시 손을 털고,

디지털에서 다시 손 내음 물씬 풍기는 아날로그 방식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steal2.jpg


bouteille (0.00.00.jpg

제일 처음 기획단계에서 접근했던 방식 그대로 연필선을 기본으로 하는 아트워크로 옮겨왔다.

처음에는 디지털에 비해 화면이 꽉 차 보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나름 나쁘지 않았다.

이 아트워크를 토대로 영상의 초입 부분을 테스트 영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스토리보드와 아트워크가 완료가 되면 작업을 진행시키기는 한결 수월해진다. 필요한 건 그저 넉넉한 시간과 그 시간을 버텨내는 노동력뿐이다.

테스트영상

만들어 놓고 보니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저 적당히 나쁘지 않으면 정말 괜찮은 걸까.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년을 몸과 마음으로 그려내야 하나의 영상이 나올까 말까 하는 작업이다. 어떤 과정에서 스스로 수긍하는 결과를 얻지 못 한다면 결코 영상을 끝내지 못 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첫 출발점으로.


여태 테스트했던 이미지들을 한데 모아 살릴부분과 쳐낼 부분을 살핀다. 어떤 기법을 쓰는 것이 이 프로젝트에 적합하면서도 합리적일 수 있을지 요리조리 맞춰보길 여러 날. 그러면서 처음 구축하고자 했던 이미지는 어떠했던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려 그려보기를 또 여러 날.


-흑과 백의 동양적이면서도 간결함이 돋보이면서,

-동양화에서 먹의 농담으로 깊이감이 표현되듯 '흑색'을 그저 까만색이 아닌 다양한 질감으로 응용해서 쓸 것.

-연필톤의 느낌을 그를 위해 사용할 것.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의 형태가 선이 아닌 면으로 표현될 것.

-디지털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


그렇게 결정된 최종 작업 방식이 결정되었다. 아직 테스트하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지만 그래도 주축이 되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 그를 앞세워 진행하면 그리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7.png 새롭게 정립된 기법을 바탕으로 만들어본 <바람>의 대표 이미지.



이렇게 최종 결정된 작업 방식(기법)과 이미지를 필두로 한동안 정체기를 맞았던 작업 속도에 쫙-쫙- 가속도가 붙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