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걱정을 띄우다/꽃에 바람을 싣다.
<너무 소중했던, 당신>을 말할 때처럼, 이 작업기도 내 일상적인 얘기와 영상의 만듦새를 함께 풀어내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내 삶의 한 부분이 이 작업과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었노라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2014년은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수평선 상에 놓여있던 해인지라, 이 시기를 지나쳤던 소소한 풍경들을 특별하게 녹여내는 게 꽤나 어렵다.
말이 좋아 감독이고 작가이지, 부산에 머물던 1년 반 정도의 기간은 거의 백수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생활이 단출했다. 그 단출함 속에서도 어떻게든 변주를 줘야 살 수 있겠기에 집 근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구했다. 그림 도구와 책상, 약간은 인테리어 욕심을 위해 장만한 올리브색 2인용 소파 하나가 작업실에 들어간 물건의 전부.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믹스커피 한잔을 들이켠 후, 오후 1시 전까지 작업실에 도착하는 게 나름의 작업실 규칙이었다. 이따금 작업실에 가기 전 물가에 자리한 카페를 찾아 책을 보거나 작업 구상을 하기도 했다. 작업실이 바다와 합쳐지던 수영강 하류쪽에 자리 잡고 있던 터라 강에서는 늘 비릿하고 상쾌한 바다 냄새가 났다. 먹이 찾아 방파제로 몰려온 물고기도 좋고, 하지 말라는데도 굳건히 낚싯대를 휘휘 내던지던 강태공들도 나에게 재미진 풍경중 하나였다.
작업이 안 풀리는 날, 실천은 없고 생각만 많은 날, 나의 모자람을 견디기가 벅찬 날, 숨이 차서 더 달려갈 기력이 없는 날은 책 하나 짊어진 채로 끝없이 걸었다. 강을 끼고 걷다 보면 어느새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남루한 작업실 삶을 가진 자가 누리기엔 꽤나 배부른 행복 중 하나였다.
바다 위 끝없게 그어진 수평선 위로, 내 하찮은 걱정을 담은 배가 자주 띄워졌다. 그러면 나는 이내 안심하고 망설임 없는 그 바다 위로 배를 가라앉히곤 했다.
개인적으로- 부산에서 보이는 바다는 정말 아름답다. 진짜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어디서 가장 큰 영감을 받느냐는 질문을 받을 적이면 나는 망설임 없이 '자연'이라고 대답한다. 지구라는 거대한 화폭 위에 자연은 매 분 매 초 다른 그림을 그려낸다.
그중 꽃은 자연이 빚어낸 가장 기이하고 환상적인 생명체다.
<바람>에는 여러 모양의 꽃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꽃은 '양귀비꽃'을 모델로 한다. 가느다랗게 뻗은 줄기 위에 한복 치마처럼 넉넉한 품을 품고 피어나는 붉은 빛깔의 꽃잎,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듯한 짙은 색의 꽃심은 바람을 품고 빛을 머금은 채 기이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나는 그런 꽃에 대한 환영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조금이나마 토해내고 싶었다.
타이틀이 등장하고 난 후(프롤로그 후), 영상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그 시작을 장식하는 것 역시 꽃이다. 물빛의 푸른색과 꽃 색인 붉은색이 <바람> 애니메이션을 장악하는 고유의 색상인데, 이 꽃을 그릴 때는 그 가운데 느낌인 보랏빛 색을 썼다. 파란색과 붉은색이 의미하는 바를 피하고자 그리 하기도 했고, 본격적인 꽃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라 주목의 의미에서도 색을 썼다.
꽃을 '이미지'가 아닌 '움직임'으로 그려낸 게 이때가 처음인지라, 만들면서 재밌기도 하고 긴장도 했었다. 지금 보면 표현에 있어 더 과감하게 그려내지 못한 부분이 보여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꽃이 망울을 맺고 그를 활짝 터뜨리기까지의 연속된 이미지를,
1.계획하고-2.그리고-3.영상으로 만들었다.
매혹의 꽃.
중심이 되는 꽃.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나비는 물론,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들도 그 마음이 동할 수 있도록 매력적인 빛깔과 모양새로 꽃을 그려내고 싶었다. 옅게 부는 바람에도 스스럼없이 넘-실대는 꽃잎을 생각할 때면 어느샌가 방긋 웃음이 났다. 이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꽃을 바라보는 이들도 그랬으면 싶었다.
다홍빛을 주 색상으로 삼는데 꽃잎에 스며든 빛에 따라 좀 더 다채로운 빛깔로 느껴지길 바라며 그림을 매만졌었다.
그렇게 첫 번째 메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 이미지를 기본으로, 영상에 등장하는 '꽃밭 씬'을 제작할 수 있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씬들 중 가장 화려하게 표현된 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꽃을 더 꽃답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곁에 부는 '바람'도 함께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대로 한들한들, 또는 건들건들 움직이는 꽃의 움직임을 테스트 영상으로 만들어봤다. 이 영상을 애니메이션에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이 덕분에 꽃의 움직임을 표현하는데 있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100프로는 아니지만 70프로? 정도는 내가 그려내고자 했던 꽃의 움직임대로 영상이 나왔다는 생각에 이 테스트 씬을 만들고 홀로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예전 학교 교수님이 '바람'을 사진에 담으라는 과제를 받고 한참을 고민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결국 찾아낸 이미지가 거친 벽면에 우두커니 솟은 한줄기 갈대였는데, 바람이 불면 휘영청 그 가녀린 몸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꽃을 그리면서 그때 그 교수님이 들려주신 '바람'을 담아낸다는 것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빛이라던가 바람이라던가 물결이라던가-
<바람>은 영상 안에서 '움직임의 결' 만으로 그들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던 작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한참은 더 달려야 하겠지만 움직임만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재와 이야기들을 더 잘 풀어낼 수 있도록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