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잠이 온다.
그 글을 발견한 건 지난 일요일 밤, 1월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네이버 애니챌린지라는 공모 프로그램을 보고 '한번 해볼까-'라는 마음이 뭉개 뭉개 피어오른 것도 잠시-
마감일이 2월 4일.

.......................?
마침 집에는 내 손님도 머물고 있던 터라 공모전은 다음번으로 미루자 털어내 버리려 했다.
그래도 뭐랄까..
요즘 작업에 있어 한참 슬럼프를 겪고 있는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이 '작업자로서의 발동'은 쉬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손님이 떠나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월요일 오후,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1분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리고 오늘(2월 4일) 오후 2시 최종 영상을 제출하고 이렇게 글을 쓴다.
이 글은 만 3일 동안 벌인 짧은 작업기를 마치며 쓰는 소감문이다.
(2월 1일 오후~2월 2일 새벽)
'새해'를 주제로 하는 1분 내의 짧은 애니메이션이 이번 공모전의 과제였다.
우선 스토리는 전날 밤, 제일 처음 이 공모전을 보면서 떠올렸던 간단한 상황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로 했다.(미리 생각해준 내 머리에게 감사)
등장 캐릭터는 '너무 소중했던, 당신'에 나온 토끼를 활용했다. 소재와도 맞았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캐릭터들을 다시 한번 그리고 싶기도 했다.
이번엔 두 토끼들에게 빨간 조끼도 입혔다. '너무 소중했던, 당신' 기획 단계에 있던 설정인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써먹었다.
야르♡
그러나 막상 본 작업에 들어가려 하자 덜컥 겁이 났다.
이 초안을 그리고 나니 더 무서워졌다.
(-_-)...
머릿속으로만 그려놓은 것을 단시간에 바깥으로 꺼내놓기는 항상 어려운 일이지만, 뭣보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조차 모호하기만 하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확실한 건 토끼 캐릭터 단 하나.
이런 어지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손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캐릭터들을 매만져대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할 수 있을까?' '이건 안 하니만 못한 시작 아닌가?'라는 의심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간략하게 씬(scene) 별로 레이아웃을 정하고 이야기 흐름대로 순서를 배치했다. 그리고 씬 순서대로 원동화 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스토리보드같이 프리프로덕션 과정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한 과정을 하면서 바로 다음에 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
기존에 있던 토끼 캐릭터 이외에도 '양'과 '원숭이'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도 다른 작업을 하는 틈틈이 캐릭터의 매무새를 매만져가며 완성했다.
2일 새벽쯤이 되었을 땐 나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대로라면 쉽지는 않지만 4일 전까지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헛된 기대도 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느끼는 작업과 마감의 쫄깃함에 맘 속 깊은 곳에서 희열을 느꼈다.(변태인 걸까)
오전 6시, 잠깐 눈을 붙이고 작업 이튿날을 맞이한다.
(2월 2일 오전~2월 3일 새벽)
3시간 반쯤 자고 일어난, 2월 2일 오전 9시 반. 2일 차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할 파일들을 두루 살피며 어제(?)의 작업을 이어나갔다. 의기양양했던 지난 새벽이 무색하게 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 보다 손이 가야 할 부분이 훨씬 많았다. 그렇다고 대충하고 넘기자니 이 작업을 시작한 원래의 취지와도 맞지 않고 또 내 성에도 차지 않을게 뻔했다. 기왕 시작한 일인데 안 하니만 못한 일로 만들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쯤 돼서는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 '나 이거 한다!!!'라고 공표까지 해버렸다. 이제 물릴 수도 없다.

(크헙....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날 제일 많이 내뱉은 말이 '아무래도 이건 못 할 것 같다'라는 말이었다. 원동화 파일이 300개가 넘어가는 시점엔 그 불안감이 최고조를 달했다. 눈앞에 정해진 마감일이 있고 '언제까지는 이 부분은 완료돼야 자연스럽게 마감으로 연결 지을 수 있다'라는 나름의 포인트가 있는데- 빠듯한 일정 속에서 도달해야 할 모든 부분들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마치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에서 균형을 잡는 기분이랄까, 넉넉한 시간에 기대어 무언가 할 수 있는 안정감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그래도-작업은 계속된다.
캐릭터 원동화 작업을 하고 라인 테스트를 하며 그가 움직이는걸 중간중간 확인하는 게 빡빡한 과정 속에 숨겨진 단 하나의 즐거움 이었다. 내가 그린 그림들이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 힘든 것도 순식간에 잊혀진다. 아마 그 덕분에 여태 이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드느라 원동화의 양이 늘어나는 건 고달팠지만 그래도-애니메이션인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나름의 애니메이션 철학이 있어 허투루 넘길 수는 없다. 사서 고생인 게지.
기존의 애니메이팅 레퍼토리가 풍부했던 토끼 캐릭터와는 달리 새로 추가된 원숭이와 양 캐릭터의 움직임을 만드는 것도 나름 신선한 압박이었다. 형태를 만들 때도 시간에 쫓겨 긴 고민 없이 만들었는데, 액팅 역시 마찬가지로 앉은자리에서 긴 고민 없이 뚝닥 만들어 버렸다. 더 연구할 시간을 가졌더라면 더 재미있는 움직임이 나왔을 텐데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도리가 있나. 캐릭터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게 나왔다.
슬 원동화 작업이 완료되어 갔다.
원동화 마무리와 동시에, 대략적으로 그려놓은 그림들을 다시 깨끗하게 정리하는 클린업 작업을 병행했다. 원동화는 85프로가량 완료/클린업은 20프로가량 완료된 상황.
가장 까다로운 마지막 씬 원동화를 남겨놓고, 2일 차 작업은 여기서 마무리됐다.
2월 3일 새벽(또는 아침) 6시. 잠깐 잠에 들었다.
(2월 3일 오전~2월 4일 오후)
3시간 후인 2월 3일 오전 9시. 3일 차 작업 시작.
어깨를 세게 맞은 듯 알싸하게 쑤셔오는 어깨 통증과 함께 수면 부족으로 인해 사고가 느려져감을 느꼈다.
우선 생각을 덜 해도 되는 클린업 작업으로 시작해서 조금 정신이 들어온 후부터는 남아 있는 원동화 부분을 마무리했다. 대략 500개의 이미지 파일이 이 애니메이션 작업에 쓰였다.
선을 정리하고, 색을 넣는 작업은 끈질긴 인내심을 요한다. 장면을 구성하는 것에 비해서는 머리를 잠시 꺼놔도 되지만 그렇다고 아예 정신줄을 놔버리면 곤란하다. 몸은 계속 움직이는 동시에 머리로는 가장 효율적인 작업을 취하기 위해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이번에 새로 등장하는 원숭이와 양 캐릭터의 경우는 컬러나 형태에 있어 아직 덜 정해진 부분이 남아있어서 이런 부분에 시간을 더 들여야 했다. 게다가 원숭이 캐릭터의 경우는 꼬리라던가, 컬러에 있어 까다로운 부분이 많아 다른 캐릭터들 작업에 비해 2~3배 정도 시간을 더 할애해야 했다.
이렇게 모든 이미지 작업이 정돈되고 시간은 벌써 2월 4일 새벽이 되었다. 1차 기본 영상 편집을 끝내니 아침 7시. 밖은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때 잠시 침대에 기대 1시간가량 졸았던 것 같다.(잘 생각이 안 난다.)
이제 사운드 작업을 더해 이 애니메이션의 기본 작업을 마무리한다.
배경 음악은 자체적으로 제작할 시간이 없어, 저작권 없이 무료로 쓸 수 있는 음원을 찾아 사용했다. 거기에 공간음(앰비언스 음향)을 추가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효과음 소스들 중 화면에 필요한 음향 효과를 적절하게 추가해서 사운드 작업을 끝맺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사운드가 불러오는 효과는 정말 크다. 그래서 되도록 사운드 작업은 전문가를 물색해 작업을 부탁하는 편인데, 이번엔 그럴 여건이 못돼 이렇게 간단히 마무리했다.
이렇게 사운드 작업이 완료되고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
1차 편집이 완료된 영상이 있고, 사운드 작업도 마무리된 이쯤이 돼서야- 정해진 시간 내에 마감이 가능하겠다는 확신이 생겨났다. 사실 그 전까지는 계속할 수 있겠냐고 스스로 되물으며 작업했었다.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가능할 법한 추가 작업을 하기로 했다. 정 시간이 안되면 배경 없이 1차 편집한 그대로 영상을 제출하려 했는데, 여유(?)가 있으니 배경 작업을 추가해서 전체 아트워크를 보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는 뒷 배경 없이 라인으로만 이뤄진 느낌으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뒷 배경을 추가해서 '면'의 느낌이 살리는 동시에 이미지 만으로도 고유의 느낌을 풍길 수 있게끔 아트워크를 보강했다.
그리고 2월 4일 오후 2시.
최종 영상을 제출하고 그간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와우!!!!!!!!!!!)
http://tvcast.naver.com/v/729356
비몽사몽 글을 써 내려갔다.
영상 마감을 끝낸 동시에 이 글을 쓰려했다가 결국 잠에 취해 몇 시간의 수면을 취하고 다시 글을 썼다.
아마 내일쯤 보면 또 몇몇 부분은 지우고 쓰기를 반복할지도 모르겠다.
생애 가장 짧고 촉박했던 마감이었던 것 같다.
이 마감을 하면서- 어떤 공모전이 가지는 일종의 승패를 떠나 나 스스로가 만들고 지킨 약속이 잘 이행되었다는 게 무엇보다 기쁘고 뿌듯하다. 아마 이 마감을 해내지 못했다면, 혹은 중간에 에라 모르겠다 옆으로 치워버렸다면 나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부분이 이 마감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 나라는 새해를 두 번 맞는 게 항상 재밌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서로의 복을 빌어주는 게 따블이라니-이 얼마나 좋은가.
다들 새해 복 많이 받고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