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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Jul 16. 2023

소월길을 걷다


하늘을 뚫고 내리던 장대비도 지쳤는지, 세력이 약해지더니 드디어 햇님이 얼굴을 드러냈다. 이때다 싶어, 소월길로 올라갔다. 해방촌 오거리 위를 걸어 보성여자 중학교 버스 정류장에 다다르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야 할 일과 기분에 따라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그도 아니면 직진을 할지를 정할 수 있는 곳.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한 길밖에 없다면 매번 같은 길을 걸어야 할 텐데 이곳에선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지 않은가.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방향을 선택해도 언제나 좋은 곳이 이곳이다. 방향을 틀 때마다 바뀌는 풍경과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작가님, 몇 시에 끝나요?”

“여섯 시요.”

“좋아요. 그럼 끝나고 저녁식사 같이 할래요?”

“네 좋아요!”

“네, 그럼 준비하고 출발하면 여섯 시 전에는 도착할 거예요. 이따 봐요.”


나는 이곳에서 걷기를 좋아한다.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산속도 도시도 어디든 걷기 좋은 곳이 이태원이다. 이태원은 모든 곳이 연결되어 있어 가까운 거리를 갈 때도 먼 거리를 갈 때도 또 멀리 갔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돌아올 때도 매우 유용한 동네이다. 오늘은 이곳 소월길 중간에서 출발해서 약속 장소로 가는데 한 시간 정도가 걸릴 예정이다. 중간에 잠시 꽃구경을 하거나 마주치는 강아지들과 대화를 할 거면 십 분이나 이십 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니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서둘러 나가야겠다.


비 온 뒤라 세상이 유난히 깨끗하고 파랗게 보인다. 20미터쯤 떨어진 듯 보이는 해방교회는 여전히 이곳의 랜드마크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해방촌을 지킨 교회 중 하나이다. 한남동 방향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남산 아래 마을들이 보인다. 중간중간 오래전에 생긴 오붓한 분위기의 카페부터 최근에 생긴 럭셔리하고 트렌디한 카페가 보인다. 길을 따라 또 길 아래로 펼쳐진 마을의 모습이 마치 하와이 어느 베이에 있었던 바닷속 산호처럼 층층이 알록달록한 모습이다. 또는 이틸이아 어느 유명한 휴양지의 바닷가 위의 마을처럼 그렇게 층층이 언덕을 이루고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소월로 아래 마을로 이어지는 계단을 몇 번 걸어보았다. 좁은 계단을 지나고 형성된 주택가는 고요한 어느 시골동네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조금만 더 걸어 이태원2동 주민센터 정거장에 도착한다. 이곳은 내가 지내는 곳과 가장 가까운 버스 스탑이다. 이곳 여름밤은 참 특별하다. 봄부터 자라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잎이 넓은 초록잎은 여름이 되면 마치 정글 숲을 이루는 듯 빽빽하고 커다랗다. 고생대 시대의 잎처럼 커다란 고사리 모양의 잎이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마치 부채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시원한 바람을 선사해 준다. 여름밤 이곳에서 찍은 달빚은 유난히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타히티의 고갱처럼 여유롭고 운치가 있다. 그러다 어느 밤에는 저 멀리 일렬로 늘어선 별을 보고 UFO유에프오를 보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는 한다.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목련꽃 향을 맡고, 개나리와 라일락, 아카시아와 장미 그리고 능소화의 진한 향기를 차례로 느껴볼 수 있는 곳. 나는 뛰어나게 예쁜 꽃이 있는 소월길이 뛰어나게 좋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풍경도 하늘과 맞닿아 걷는 이 순간도 너무도 생생하고 귀중한 경험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얏트 호텔을 가기 전 리탐빌 요가 카페에 잠깐 들를까. 시간을 보니 오늘은 그런 시간이 없다. 한동안 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지나가나 눈인사라도 하고 갈까 생각했는데. 방향을 틀어 가던 길로 가려는데 갑자기 함께 수련했던 친구가 문밖으로 나온다.

“어머나! 다이아님!(내 닉네임이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앗! 네네, 그냥 한번 카페를 둘러보려 했는데... 오랜만이네요 정말! 잘 지내셨죠? 모두들 잘 지내고 계시죠?”

오늘은 갈 곳이 있어 인사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며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어쩐지 오늘은 누군가를 만날 것 같았는데,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지내는 도시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이지 정겨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가던 길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25분을 더 걸어야 한다. 날씨가 좋으니 걷는 발걸음도 가볍다. 하얏트 호텔의 공원을 지나 이제 산속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듯 한 내리막 길이다. 그 길을 중간에 리움 뮤지엄이 있다. 오동나무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파리의 퐁피두 뮤지엄과 비슷한 철제 구조물을 옆으로 두고 오른쪽이 미술관의 메인 건물이다. 그 앞으로 잔디가 있고 아니쉬 카푸어 동그란 물방울(작품명: 큰나무와 눈) 작품이, 맞은편에 하늘을 담는 동그란 대형 접시모양의 구조물(작품명: 하늘겨울)이 무엇이 조각품인지 무엇이 하늘인지, 건물인지를 구분하기 힘들게 자연에 자연스레 녹아져 있다. 하늘을 담은 접시를 뒤로하고 왼쪽벽에 드리워진 담쟁이넝쿨을 따라 내려가면 큰 찻길이 나온다. 신호등이 바뀌고 재빨리 건너면 순천향 병원 근처로 순천향 병원으로 가는 힙한 도시 골목길과 풀잎이 무성한 도시 오솔길이 나온다. 조금 뒤 한남동 작가님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십분 전 여섯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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