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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Jul 15. 2023

초록 지붕 집 Anne of Green Gables

“앤, 앤, 초록 지붕 집 앤 셜리!”

남산을 산책하다 볼록하게 올라와 반원모양으로 펼쳐진 나무다리를 만났다. 

“어머! 너구나! 너 여기에 있었구나!”

앤이다. 한 여자아이가 양 팔꿈치를 난간 위에 올리고는 무심한 듯 턱을 괴고 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앤이다. 초록 지붕 집 앤 Anne of Green Gables! 철자 E로 끝나는 앤 Anne! 

‘앤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그도그럴것이 봉긋하게 가운데가 올라와 있는 나무다리와 아름드리 벚꽃나무, 밤나무,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나무, 저 나무들로 주위가 둘러 쌓인 풍경이 마치 앤이 등장하는 만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기분이다. 


나무로 된 다리는 열 걸음만 걸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짧고 아담하다. 매번 이 다리 위를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온다.

“음 음 음 음 …” 

제목은 알 수 없으나 경쾌하고 가볍다. 다리의 중간 쯤 가장 볼록한 부분에 다다르면 양팔을 벌리고 빙그레 돌아보기도 한다. 앤이 그랬던 것처럼 딱 그 모습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초록이다. 반짝이는 초록 잎 사이로는 파란하늘과 하얀 구름이 조각이 되어 떠다니고, 시원한 바람이 쏴아아 하고 불어오기도 하다. 나도 숲도 앤도 이 다리를 지날 잠시 눈을 감는다.  


앤을 만난 건 정말이지 우연이다. 2년 전 어느 봄날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지내는 곳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남산이다. 4월의 남산은 벚꽃이 만발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온통 연분홍색 벚꽃이 한창이다. 올록볼록, 동글동글한 남산의 환한 모습에 나도 기운이 동글동글 해졌나보다. 밖으로 나왔다. 숲 입구까지 다다르는 길은 오르막이라 조금만 몸을 앞으로 기울여 천천히 올라가면 된다. 드디어 볼록한 도시 끝에 다다르고 신호등을 건너면 동그란 숲이 나온다. 


산 속에 피어있는 벚꽃은 예뻤다. 연분홍색 또는 하얀색 꽃잎은 종잇장보다 얇았다. 꽃잎 끝은 물결치듯 구불했고 수채화 물감이라도 한 방울이 떨어진 듯 중심에는 진한 분홍색이, 끝으로 갈수록 점 점 더 색이 흐려져 원래의 색이 보일 듯 말 듯 하얀색을 띄고 있었다. 꽃잎 가운데에 피어난 수술대 끝에는 노오란색 분이 앙증맞은 얼굴을 두 개 세 개씩 뽐내고 있었다. 꽃은 하나, 둘, 셋, 넷, 열 송이, 스무 송이가 무리 지어있다. 마치 커다란 솜사탕 구름을 만들어놓은 듯 여기저기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그 모습이 온통 하예서 나는 마치 눈꽃 세상에 들어온 듯 눈이 부셨다. 연하고 산뜻한 벚꽃 향기가 더해져 나는 앤이 그랬던 것처럼 두둥실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떨어지는 꽃잎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로 흩날리다 어느 순간 발밑에서 그룹을 지어 모이더니 양탄자를 만들고 주위를 감싼다. 몸이 두둥 공중으로 올라가 꽃잎에 둘러싸여 뱅글뱅글 돌며 춤을 춘다. 앤이 여기에 있었구나. 앤을 따라 나도 뱅글뱅글 돌아본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동쪽 끝으로 차를 몰고 여행을 했었다. 열흘 동안 친구들과 번갈아가며 운전을 하며 오른쪽으로 펼쳐진 생 로랑강fleuve Saint-Laurent의 일출과 석양을 보았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자연이라니! 트르와 리비에르Trois-Rivières, 퀘백시Québec, 누보 브론즈윅Nouveau-Brunswick, 생존Saint-John 그리고 피이아이PEI, Prince Edward Isaland로 차를 몰았다. PEI에 앤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 설레었다. 어릴 적 책 속에서만, TV 만화 속에서만 봤던 앤을 만나게 되다니. 앤은 아직 저곳에 살고 있을까. 멀리 보이는 초록 지붕 집을 바라보며 드넓은 초원을 걸었다. 초록 지붕 집에는 어떤 향기가 날까. 눈의 꽃 여왕님은 아직 계실까. 마릴라 아주머니의 키친에는 어떤 티세트가 있을까. 앤은 여전히 창틀에 걸터앉아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을까. 마침내 초록지붕집에 도착하고 집의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앤은 보이지 않았다. 


앤은 자취만 남긴 채 어디론가 떠난 듯 했다. 앤은 어디로 간 걸까. 끝내 앤을 만나지 못해 실망했었다. 초록 지붕 집 방문은 그렇게 나의 기억에서 희미해졌고 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20년이 훌쩍 지난 뒤 어느 봄 날 앤을 다시 만났다. 이태원의 볼록한 숲에서. 앤과의 만남은 정말 극적이었다. 반달 모양 나무다리위에 턱을 괴고 있는 앤이라니. 앤은 그 옛날 호기심이 가득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상상 속 세상을 즐기던 사랑스런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나! 앤, 또 봐서 반가워! 앤, 넌 여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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