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관한 글을 좋아한다. 색깔과 모양이 한 번도 꼭 같은 적이 없다. 글쓰기가 어렵다고 하는 분들에게 감정을 먼저 적어 보시라 했다. 이 얼마나 쉬운 제안인가?
그런데 정말 그럴까? 두 번 생각해 보니,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주변의 사물을, 일어나는 일상을 그대로 적어 보시라 했다. 그리고는 그것도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기를 써보시라 했다.
글쓰기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다.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낯설음과 어색함 때문이다. 그것을 어쩌면 공포스럽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일기를 썼다. 초등학생일 때, 방학 숙제였다. 방학 내내 미뤘던 일기를 개학 하루 전에 채웠다. 소재와 주제를 찾아야 하니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주위에 보이는 것도 뭐든 쓰며 공책의 빈 공간을 채웠다. 날씨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어느 날은 해가 쨍쨍한 그림을, 또 어느 날은 우산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림을 아무렇게나 첨가하곤 했다. 그때 나는 감정을 썼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다소 뻔한 스토리를 능청맞게도 이날 저 날에 배치했었던 것 같다. 가령 친구들과 즐겁게 보냈다 던가, 맛있게 무엇을 먹었다라 던가, 언니와 재미있게 놀았다 던가 같은 들이다. 감정은 어디로 간 걸까.
고등학교 때는 달랐다. 매일 일기를 썼던 기간이 있었다. 마음이 힘들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혼자 느끼는 감정을 적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로 화를 내며 일기장을 분노로 도배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일기장에 흩뿌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 무얼 했다는 일상 보고는 간헐적인 소재였다. 그보다 꼭꼭 숨겨놓았던 내 마음을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터뜨리고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 20년 전의 일기장을 보았다. 치열하게 나의 감정과 대화하고 있던 순간들이 즐비했다.
처음 다시 본 일기장은 어쩌면 흥분된 글들의 나열이었다. 일상의 흐름은 종종 명확지 않았다. 몰라도 되었나 보다. 표현할 곳이 그곳밖에 없었는지 온갖 모양의 감정 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있었다. 그것도 내 인생의 보석 같은 친구들이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잘 모른다. 이제와 보니 꽁꽁 숨겨놓았다기보다는 일기장 때문인 듯하다. 친구들보다 편한 일기장에 나는 수많은 마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매번 동일어 반복인 듯했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피난처가 있는가? 그 누구에게도 나의 치부를 드러낼 수 없다면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작은 종이 조각이 때로는 큰 힘이 될 수 있으니.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를 반복해도 괜찮다. 그렇게 해서 내 속이 비어질 수 있다면 우아하지 않아도 좋다. 지적인 글쩍임으로 나를 포장하기 전에 날것을 사정없이 드러내는 작업이 먼저 일 수도 있다. 혹은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러고 싶다.
천박하나 우아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아마 쇠처럼 차가운 냉정을 직시하고 날 것의 자아를 드러낼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겠다. 용기이든 베짱이든 뻔뻔함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확실히 뜨뜨 미지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시에 와르르 넘어지는 거대한 파도일 듯하기도 하다. 그렇게 크고 시원하지 않을까. 그리고는 다시 우아한 몸짓의 조각층을 쌓는 너울 파도로 변하는. 지금 나는 그런 글이 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