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 운동을 시작으로 조금씩 루틴을 만들었다. 한 걸음씩 걷기, 아니 반 걸음도 좋으니 일단은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뭐든 의지가 필요하다. 의지는 의도에서 나온다.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면 움직임을 선택할 것이다. 소명과 사명을 떠올렸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건강한 신체라는 걸 알게 된다. 신체가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진다. 신체는 정신적인 의도에서 나오니 사명과 소명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나 같은 사람은 그게 선행되어야 했다.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득하기 위해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 우주에, 그중 이 지구에 떨어진 이유를 찾기 시작했으니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질문이었으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사람은 뇌를 이용할 때 도파민이 생기나 보다.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있다면 질문하기를 추천한다.
살아갈 이유를 찾고, 걷기 시작했다. 산속을 걸었다. 집 근처가 남산이니 산속 초록 생명체들이 내어주는 산소를 마음껏 흡입했다. 내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초록들이 마시고, 나는 그들의 산소를 마셨다. 상부상조하는 관계였고, 나의 쓸모 있음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산을 걷는 일은 습관이 되었다. 내가 쏘아 올린 화살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다. 몇 년 전 상하이에서 내가 체험한 일이었다. 쓸모없는 인생으로 여러 해를 보내다 어느 날 나는 악마임을 확신했을 때, 한 한국 목사님을 만났다. 한국인과의 친분 섞인 단독 교류는 2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에게 나는 악마임에 틀림없어요!라고 하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진심이었고, 그도 진심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뒤로 하고, 내가 한 일은 묵묵히 침묵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할 수 없는 말이 조금도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인생을 살며 그렇게 침묵하는 습관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침묵이 미덕이어서가 아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개인적인 일을 가미한 대화가 종종 어려웠다.
오늘, 그날의 느낌을 회상하며 새벽에 책상에 앉았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내 인생은 너무도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확신했다. 내 주변인들은 모두 나를 만나면 잘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날부터 우울해졌다. 나만 우울했다. 그래도 내가 가진 것에 늘 감사하다 했다. 슬픔이 동행해도 괜찮았다.
새벽에 일어나 마음을 담을 넓은 공책을 찾았다. 여기저기 공책과 메모지는 많은데 내 마음을 담은 널따란 공간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을 찾다 분주한 책꽂이 사이에 있는 얇은 노트를 꺼냈다. 올해 Petit Parlais쁘띠 팔레에서 데려온 모네의 그림이 그려진 노트다. 한 번도 쓰지 않아 새것이었다.
며칠 전 토요일에 들었던 슬픈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오늘 새벽에 그 슬픔의 실체를 글로 남기고 싶었다. 나는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기로 했다. 나만 아는 내 모습이다. 누가 뭐라든 그런 나와 잘 지내면 된다는 걸 안다. 늘 슬픈 건 아니므로 언제나 울음 가득한 눈으로 살진 않으니 주위에 폐를 끼치는 일도 드물다.
슬픔에 빠져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핸드폰에서 느닷없이 과거의 사진이 떠오를 때가 그렇기도 하다. 이번에는 계획에 없었던 일이 생기며 루틴이 혼란스러워진 탓이다. 감정을 가라앉히려니 먼저 슬픔의 물을 흘려보내야 했다. 끝내 토요일에는 급한 마음에 잡고 탄 택시 안에서 눈물이 났다. 창문으로 스치는 초가을 바람에 눈물이 차가웠다. 그리고 며칠간 울먹이는 일의 반복이다. 입 언저리가 실룩거린 지 3일째다. 달리기를 하다, 생각에 빠져 걷기를 한다.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답답한 마음이 더해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치기도 한다. 결국 생존 때문이다. 몇 년간 애써 쏜 화살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걷고 또 걸었다. 어쨌든 나는 잘 될 거니까, 이 순간을 또 잘 넘겨보자 혼잣말을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가을바람이 청명하다. 올해 2025년도 3개월 가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