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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Aug 22. 2023

108 계단 옆 독립서점


폭풍전야인가. 고요하다. 오늘 할 일은 많으나 가야 할 곳이 있다. 요즘 다시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언급한 대로 2층에 있는 짐에서 운동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면 부처님이 날 기다리고 계신다. 법당으로 들어가 인사를 올리고 이내 108배를 하기 시작한다. 108배가 끝나면 자리에 네모난 방석을 깔고 앉아 명상을 시작한다. 이태원에 살면서 누리는 특유의 조합이기도 하다. 새로 생긴 짐 덕분이기도 하다. 108배를 다시 시작하니 근처 108 계단이 떠올랐다. 예전부터 말로만 들었던 이곳을 오늘은 꼭 가보기로 결정했다. 재빨리 구글링을 해보니 후암동 종점에서 계단이 시작된다고 한다. 후암동에 산 적도 있었는데, 내가 살았던 곳은 명동과 가까워서 그랬을까 당시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몇 주간 바쁠 것 같고, 오늘이 마지막으로 시간이 될 듯하다. 마음이 조금 급해지기는 했는지 나는 이미 계단을 걷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불현듯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빗방울이 한두 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오늘이어야만 했으니까…


소나기가 지나가는 것이었는지 두 시간 뒤 비가 그치는 듯했다. 얼른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생각해 둔 대로 후암동 종점으로 가는 2번 마을버스를 탔다. 동그란 로터리가 중앙에 있는 종점에서 내린 적이 처음이었다.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찻길도 사람길도 꽤 좁은 동네인데, 종점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광장에서나 볼 수 있는 로터리에 주변과 비교하면 꽤 넓은 지대가 공터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미리 봐둔 방향으로 걸어가니, 말로만 듣던 108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은 연세가 지극한 어르신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다행히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위아래로 수시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108 계단을 걷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옆 좁은 계단으로 올라갈 참이었다.


그때 한 상점을 보았다. 안쪽에는 책과 문구들이 통창을 통해 보였다. ‘스토리지 앤 필름’이라는 독립서점이었다. 이태원 일대에 독립서점이 여럿인데, 이곳에도 있다니. 요즘 들어 작고 아기자기한 이런 독립서점을 방문하는 재미가 생겼나 보다. 오늘도 급하지 않으니 잠깐 들어가 보았다.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라 문구제품보다는 책이 먼저 눈이 들어온다. 독립서점 주인은 어디서 이런 책들을 고르는 건지 그 정보의 출처가 참 궁금하다. 책은 대부분 매우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다. 적어도 책표지와 디자인, 책 제목이 그러하고 내용도 대부분이 그러하다. 대형서점에는 볼 수 없는 감성이 있다. 심지어 흘러나오는 음악조차 서정적이다. 나는 책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몇 십 분이 지났을까 시끄러운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밖을 보니 장대처럼 비가 하늘에서 직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쏴아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빗소리를 듣자니 복잡했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더더욱 서두를 것이 없다고 나에게 말하는 나를 보았다.

이와 이렇게 된 거 책 구경을 더 하자. 마음먹고 책을 유심히 살폈다.

책은 규격화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크기의 책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특이한 크기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로로 길고, 가로로 좁고. 작은 사각형 모양에, 매우 두껍거나 매우 얇은. 특이한 제목과 내용도 있었다. 이리저리 유심히 보다 겨우 세 권을 데리고 왔다. 일본 작가가 쓴 그림책, 52번의 아침을 이야기한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가의 책(한국인), 22살에 자각몽을 꾸는 작가의 일기장. 평소 읽지 않는 책 세 권을 들고 서점 옆 108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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