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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Aug 23. 2023

걷는 동네 이태원

파리는 걷는 재미가 있는 동네이다. 평평한 거리에 구역마다 색다른 맛이 있어, 하루종일 걸어도 재미있다. 어딜 가도 특색이 있고, 통유리로 된 상점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다. 공원이 있고, 길게 뻗은 가로수길도 있다. 서울에도 그런 동네가 있다. 내가 사는 이태원이다. 근처 명동과도 가까워 종로까지 크게 걸을 수도 사는 곳 주위로 작게 걸을 수도 있다. 오늘은 늘 그렇듯 숲을 시작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날씨를 보니 오전부터 비 올 확률이 100%. 숫자를 찰떡같이 믿는 나다. 10시부터 비가 온다고 하니 그전에 산책을 모두 마무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짧은 명상을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우산도 잊지 않고 챙겨갔다. 숲으로 들어가니 어제 온 소나기 덕분인지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나뭇잎도 초록물을 더 입은 듯 싱그럽게 반짝인다. 여전히 기다란 나뭇가지에 새벽안개인지 어제 떨어져서 남은 빗방울인지가 방울방울 맺혀있다. 인기척 없는 숲에서 무언가 후다닥 하고 지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청설모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적지않이 당황한 표정이다. 체구를 보니 꽤 말라있는 게 어린 청설모인 듯하다. 숲을 자주 다니다 보니 이제는 청설모의 나이도 알아맞추는 산사람이 되었다. 나무통 아래를 쳐다보는 청설모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커다란 잣이 떡 하고 있는 것이다. 청설모가 뜯었는지 구석이 조금 파여있었다.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와 잣을 번갈아 쳐다보는 걸 보니 잣을 잃을세라 꽤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어린 청설모의 속앍이가 느껴지자 나는 얼른 미안해져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미안 미안! 네가 거기 있는 줄 몰랐어~

바쁜 걸음으로 잣에서 멀어지고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녀석이 나무 아래로 내려오더니 다시 자기 몸짓만 한 잣을 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숨죽여 쳐다보고 있는데, 쫄망한 그 녀석이 귀여울 수가 없다.

 

저 작은 아이도 살기 위해 저리 필사적으로 투쟁을 하는 데, 나는 뭘 하는 걸까 하는 느닷없는 자괴감도 살짝 들었다.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숲을 걷고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럭셔리한 삶을 살고 있는 데, 나는 왜 불안과 불만에서 벗어나지 않는 걸까. 지금 이대로 이 시간에 만족을 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나면 여전히 수많은 생각을 컨트롤하려는 나를 보게 된다. 청설모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발걸음을 옮기니, 녀석이 다시 긴장하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커다란 잣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상상해 보았다. 나도 청설모처럼 내 키만 한 물체를 입으로 옮길 수 있을까?


푸핫! 하하하

아니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청설모가 나보다 나았다.


자리를 옮기고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모기떼가 나를 따라오는지 따끔거린다. 아직 여름이라 어쩔 수 없다. 성가신 모기떼를 팔로 이리저리 휘저으며 걸었다. 앞에 떨어져 있는 밤송이를 발견하고는 또 걸음을 멈췄다. 벌써 밤이 떨어지는 시기인가. 그러고 보니 이제 8월의 마지막이 서서히 다가오고 여름이 끝나면 추석이 다가온다. 남산에 밤송이가 떨어지는 계절이다. 한 해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갑자기 쏴아아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숲 속 오솔길은 나뭇잎들이 캐노피가 되어 비를 가려준다. 비를 맞지 않고도 빗 속에 있을 수 있다. 숲은 그래서 좋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숲에서 나와 맞은편 갤러리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전시를 볼 수 없었다. 제목이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근처니 조만간 지나가다 볼 수 있겠다며 다음에 오기로 한다. 일상에서의 탈출을 경험하고 싶으신 분들은 남산 하얏트 호텔 근처 갤러리로 오시길…


경리단길에 들어서니 비가 세차게 오기 시작했다. 이런 비라면 1초라도 서있었도 옷이 젖고 신발이 젖는데, 오늘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바쁘게 처마아래로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서서 쏟아지는 아니, 하늘에서 아마도 하느님이 양동이로 쏟아붓는 중이 아닐까 한다. 쏟아붓는 비를 작은 우산 하나로 막으려니 우산이 뚫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세찬 빗소리와 바닥을 튕기는 빗방울은 음표가 되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참을 서 있었다. 발이 붓고 옷이 젖어 달라붙었다. 그래도 신나는 순간이었다.


잠시 뒤 이제 갈길을 가기로 한다. 걸어갈까 버스를 탈까를 고민하는 찰나 버스가 내려온다. 아래까지 내려가야 하니 이 빗속을 걸을 수는 없었다. 낭만은 이 경우에는 조금 미뤄둬도 될 듯하다. 버스로 시장까지 내려와 남매국밥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국밥을 먹는 일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11시니 아침은 아니지만 특별히 아침에 거한 식사를 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렇다. 이곳은 이전에도 언급한 바가 있듯이 자주 오는 곳이다. 나는 식사할 곳과 시간을 보내는 장소를 정할 때 좀 섬세(?)한 편이다. 원하는 분위기가 가장 중요한데, 그 분위기는 나만 알고 있는 것이라 뭐라 딱히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다. 아무튼 나는 매번 나에게 맞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한다. 정확한 이유를 하나를 들자면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이유가 아마도 가장 정확한 이유겠다. 나는 기분이 좋아지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 장소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다.


남매국밥집에서 음식을 먹고, 주인 분들과 조금의 담소를 나눈 뒤 돌아오는 길에 비가 멈춘 사실을 알았다. 신호등을 건너려는데 차도 가운데 차 세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사고가 났나 보다. 

벤, 기아자동차, 테슬라 순이다. 벤은 멀치감치 떨어져 있고, 기아자동차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신사분이 차 옆에서 서서 앞에 있는 테슬라 주인인 듯한 젊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테슬라 뒷 범퍼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슬쩍 봐도 큰 사고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기아와 테슬라의 충돌이라니… 기아자동차를 타고 온 신사분이 조금 걱정되는 아침이었다. 

이 동네에서 걷다가 보는 풍경들은 참 다양하다. 다양한 만큼 다양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감동이 때로는 재미가 때로는 슬픔이… 오늘은 연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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