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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Sep 24. 2023

운동화 끈

“운동화 끈을 맬 수 있습니까?“

‘이 무슨 소리지?’

“네?”

갑작스런 질문에 헛 대답이 터져 나왔다.

“운동화 끈을 먼저 매야 달릴 수 있습니다.”

‘아..!’

“운동화 끈이요?”

“아직 운동화 끈을 맬 힘도 없는 이에게 달리라는 건 가혹합니다.”

순간 우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서 등장하는 운동화를 떠올렸다. 

치즈를 찾기 위해 매일 아침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집을 나서는 생쥐와 꼬마인간. 

외면하면 사라지는 고통은 없는건가? 세포 구석구석에 박혀버린 기억은 떨쳐낼래야 떨쳐지지 않는 끈적거리는 송진같은 걸까. 

그의 말을 되내이며 나도 모르게 꼬마인간 ‘허‘를 응원하고 있었다.

“허, 먼저 그 운동화 끈을 조금씩 매는 연습을 해보는 걸 추천할게. 충분히 쉬고, 충분히 너의 시간을 가지고, 그리고 조금씩 시도해보는 건 어때?”


그림 속 인물이 귀를 갖지 않고, 입을 갖지 않음은 듣고 싶지고 말하고 싶지도 않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혹시 그 무엇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은 걸까? 모든 것들에서 뚝 떨어져 홀로 떠있는 시간.

사람들 사이의 공허함을 사람들로 채우기를 반복한다면 또다시 생겨버린 빈 공간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모래같은 나의 영혼으로 구석구석을 채우기 위해 그 수많은 홀로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작디작은 모래 알갱이는 허한 틈을 채워주는 그 무엇보다 단단한 에너지원이 되어주었다. 


“운동화 끈을 매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요.” 걷든 달리든 그 무엇이든을 위해 운동화 끈을 매는 시간이 필요하다. 짧고 김을 시간으로 계산하기를 그만할까 한다. 중요한 건 에너지임을 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우주가 공명하는 소리만이 배경음악처럼 들릴 때, 그때서야 온전히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수백억년 지구역사의 끄트머리에 우뚝 존재하는 나에게 이곳까지 왔으니 참 수고했다고 다독여줘야 마땅하지 않을까. 달리기를 하지 못하는 나에게서 비뚤어진 시선을 이제 그만 걷어 들인다. 겨울에도 여전히 사랑을 믿는 나를 칭찬한다. “아주 잘하고 있어.” 따듯한 이불 속의 몽롱함을 한껏 안아준다. 채찍질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 뿐이다. 


과거 나의 패턴을 떠올려보면 의지는 돌파구가 아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 마법의 봉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었던 순간이었다. 순간 삶은 물 흐르듯, 바람 흐르듯, 빛 흐르듯 자연스레 나를 이곳저곳으로 이끌어갔다. 나는 그저 모든 것에 나를 내맡기면 되었다. 


겨울이 길다고 저항하지 않아도 된다. 추운 겨울내내 땅의 결은 단단해질 것이고 땅속의 생명들은 찬란히 피어날 봄을 위해 온전한 에너지를 모으고 있을테니까. 분주함이 사라진 일상이 감사한 이유는 온전히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음을 의미한다. 없는 생명으로 살아가기보다 진심으로 존재하는 생명으로 살아가자. 숨소리만 귓전에 맴도는 순간에도 평온함을 느꼈듯이 어둡고 추운 겨울에도 찬란한 눈이 존재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모든 순간이 반짝반짝 빛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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