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떡볶이
종이컵 하나가 넘치게 가득 담아주던 떡볶이. 일명 컵볶이는 학창 시절 주린 배를 채워주는 환영받는 간식이었다. 걸어 다니면서 먹을 수도 있고, 혼자 먹기에 양이 조금 아쉽지만 간식으로 먹는 데는 불만이 없는 합리적인 양과 가격이었다. 하교 후에, 학원 가기 전에, 학원 끝나고... 떡볶이집만 열려 있다면 언제든 먹을 수 있다. 추운 겨울에 뜨거운 어묵 국물을 입이 델까 호호 불어가며 먹는 떡볶이는 한국인들의 최애 간식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어묵 국물은 떡볶이를 먹으면 공짜라니, 한국인의 푸근한 인심과 식문화를 보여준다. 피카추 돈가스도 이 무렵부터 유행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제 소스를 쓱쓱 발라주는 피카추 돈가스의 새콤달콤함과, 빵가루를 발라 튀긴 핫도그를 설탕에 스르르 굴려 케첩과 머스터드를 듬뿍 발라 먹는 핫도그는 지금도 <명량 핫도그>에 발길을 끊을 수 없는 이유, 학창 시절의 입맛이자 국민의 입맛이다. 떡볶이는 유난히 여성들이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고, 칼로리는 맛있는 정도라고 누가 그랬는가. 몇 년 사이에 인기 급부상을 한 <신전 떡볶이>가 2천 칼로리 이상이라고 하질 않나 떡볶이는 탄수화물과 당의 조합으로 다이어터들이 절대 먹어서는 안 될 음식 1위에 늘 꼽히기도 할 뿐만 아니라 떡볶이가 주제는 아니지만 오랜 베스트셀러인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의 책은 책을 읽기도 전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공감했던 책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전학 가기 전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았던 동네에는 또래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생 걸음으로 편도 2-30분 정도 걸리는 학교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고, 학교에 가보면 여기저기 멀리 사는 친구들이 많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하교 후 동네로 오면 함께 놀 거리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들과 초등학교 내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동네 친구들은 나까지 3명, 삼총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 초등학생들의 놀이가 대단할 리 없었고, 당시만 해도 다들 학원은 피아노 학원이나 수학 학원정도 하나 다닐까, 여가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온 동네는 우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밖을 뛰어다녀서 피부도 까만 편이었고 자주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마를 날이 없었던 내향형 말괄량이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릴 때 친구들과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꿉 시절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삼 남매 중에 중간 둘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기본적으로 출생 순서에 따른 서러움과 억울함을 탑재하고 어린 시절을 감수성 넘치게 보냈다. 상대적으로 나보다 기가 세고 똑똑하지만 장난기 많고 개구진 4살 터울의 언니와 천방지축 난리 법석 골목대장을 자처하던 사고뭉치 2살 어린 남동생 사이에서 늘 주눅 들고 할 말 못 하는 부끄럼 많은 울보였다. 게다가 확신의 내향형이었던 어린 시절에는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어찌나 눈물부터 나는지, 언니와 남동생이 사소한 일들로 종종 놀렸고 나는 눈물을 쏟기가 일쑤였다. 집에서 쌓인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골목대장 노릇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큰소리를 친다거나 친구들한테 이거 하자 저거 하자 귀찮게 하는 일이 많았다. 눈이 크고 조용했던 친구 미연이는 다행히 내가 무얼 하자고 해도 늘 오케이 해주는 착하고 순한 친구였고, 나와 비슷한 듯 다른 성격인 종미는 의견이 부딪치기 일쑤였다. 학교 성적도 둘이 엎치락뒤치락 비슷한 편이어서 나 혼자 라이벌 의식을 느꼈고,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그 친구의 집이 계단이 있는 2층 집에 온갖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 어찌나 부럽던지. 어린 마음에 질투가 많이 났던 것 같다. 나이가 엄청 많은 거북이 2마리, 마당을 지키는 진돗개 2마리, 알을 품을 줄 몰라 자기 알을 쪼아 먹던 앵무새까지. 할아버지의 정성 어린 홈메이드 모이 덕분에 학교 앞에서 사 온 병든 병아리를 닭까지 키워 시골로 보낸 친구 집은 어릴 때 나의 시선에서는 신기하고 대단한 집이었다. 친구의 할아버지께서는 직접 달걀 껍데기와 노른자로 모이를 만들어 병아리를 먹이셨는데, 분명 나랑 종미랑 같이 산 병아리가 잘 먹어 그런지 몸집이 달라 나의 병아리도 그 집으로 보내주었다. (결국 시골에 가서 잡혀먹을 거라는 소식에 매우 슬펐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붙어 다녀서 부모님들끼리도 잘 알았고, 항상 함께였지만 쓸데없는 것들로 많이 싸우기도 했고, 지나고 보니 서로 선물도 이것저것 많이 주고받았고 어린 시절을 더욱 따뜻하게 해주는 가깝고 소중한 소꿉친구들이었다. 이 친구들과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신기하게 같이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어릴 때였으니 동네에서 실컷 놀다가 때 되면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어서 그런 걸까. 길거리 군것질도 학교 앞 불량식품이나 솜사탕 정도가 전부였고, 동네 떡볶이집도 이 친구들과는 거의 가본 기억이 없었다.
나의 첫 기억이 시작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살던 동네에서 갑자기 6학년 때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신도시여서 아파트가 빽빽했고, 지역마다 학군이 정확히 정해져 있어서 멀리 사는 친구는 있을 수 없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걸어서 10분, 최대 15분 이내의 거리의 아파트에 살아서 방과 후에도 집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떼거지로 몰려다니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학원도 근처, 학교도 근처, 놀이터도 아파트마다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놀러 다녔다. 이전에 세 명이서 투닥거리던 때와는 다른 스케일의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한 친구가 전학 이튿날에 ‘학교 끝나고 같이 놀래?’라고 물어본 장면은 영화 <우리들>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나를 무리에 껴준 친구를 시작으로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그때 그곳에서 나의 떡볶이 시대가 열렸다. 6학년부터 자연스럽게 중학교까지 이어지던 교우관계는 대부분의 사춘기 시절이 그렇듯 바람 잘 들 날이 없었고, 싸우기도 울기도 웃기도 많이 했던 요란 법석한 학창 시절이었다. 어리긴 했지만 지금까지 인생에서도 인간관계에 대해 어느 때보다 많이 고민하고 많이 배우며 성장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파트 단지를 품은 동네 마트 한 편에 떡볶이를 파는 떡볶이 맛집이 있었다. 일명 베스토아 떡볶이. (마트 이름이 베스토아였다. 지금은 로또 전문점만 있고 마트 체인은 없어진 것 같다) 늘 배고팠던 여중생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으러 방과 후에 거의 매일 들렀다. 여럿이서 오백 원 천 원씩 모으면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중학생들도 문제없이 간식을 해결할 수 있던 좋은 시절이었다. 튀김도 각자의 취향껏 고르는데 언제나 야끼만두와 김말이는 호불호가 없는 우리들의 MUST 조합이었고, 떡볶이에 버무려 주는 튀김 범벅을 생각하면 지금도 글을 쓰면서도 군침이 날 정도로 맛이 좋다. 문제는 이 맛있는 떡볶이를 실컷 먹고 집에 오면 당연히 배가 고플 터가 없었기 때문에, 군것질이나 외식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엄마한테 떡볶이를 먹고 왔다고 하면 혼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떡볶이를 먹고도 집에 가서 안 먹은 척 천연덕스럽게 저녁식사를 가족들과 함께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떡볶이를 탐닉하기 시작하고 중학교 3년 동안 몸무게가 무려 15킬로 늘었는데, 키는 중학교 1학년 때 멈춘 건 안 비밀이다. 다른 군것질도 많았지만, 15킬로의 주역은 분명 떡볶이임이 틀림없다. 떡볶이도 지나치게 맛있긴 했지만 친구들과의 원활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중학생 시절 급격하게 살이 쪄버린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늘 마른 편에 속하던 나였는데, 중학교 사춘기를 보내면서 자존감도 뚝뚝 떨어진 흑역사의 시절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중3이 되자 대가리를 뗀 골프채를 매로 들고 다니는 기술, 산업 선생님을 필두로 학교에서 교복 단속을 어마 무시하게 하였는데, 복도에서 부딪친 선생님들께 종종 치마를 줄인 게 아니냐며 혼이 나곤 했다. 억울하게도 살이 쪄서 교복 치마가 너무 타이트해서 받는 오해였다. 살쪄서 그런 거라고 얼굴이 빨개져 말씀드리면 선생님들께서도 멋쩍어하시며 지나가시곤 했다. 떡볶이는 나의 사회생활의 격렬한 흔적이자 지금도 나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겨버린 애증의 떡볶이다. 그때 찐 살이 지금까지도 나의 피와 살이 되어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떡볶이는 죄가 없기 때문에 미워하지 못하고 여전히 열렬히 사랑하며 다이어트의 적이지만 나의 영혼의 음식이자 소울메이트인 떡볶이와는 늘 나 홀로 밀당을 하고 있다.
이렇듯 떡볶이는 대한민국의 대표 길거리 음식으로 나의 개인적인 역사로만 봐도 20여 년간 지금까지 애정을 듬뿍 주고 있는데, 최근 떡볶이가 무섭게 신분 상승을 하고 있다. 배달음식이 본격화되던 2010년 중반부터 학원 가느라 바빠 떡볶이를 사 먹을 시간 없어 컵볶이를 먹는 초중고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성인들까지 즐길 수 있는 떡볶이의 브랜드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전에는 동네에 있는 작은 분식집에서 비닐 씌운 접시에 1인분씩 담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주던 우리의 떡볶이가 대단한 변신을 꾀했다. 튀긴 대왕 오징어도 올라가고 차돌도 올라가고 매운맛 조절도 가능해진 데다가 중국 당면에 분모자도 들어가고 최근에는 로제 떡볶이까지 인기를 한몫 챙기며 떡볶이가 환골탈태한 것이다. 떡 맥(떡볶이+맥주)도 새로운 조합으로 떠오르면서 어린 시절 입맛을 떠올릴 성인을 겨냥한 떡볶이집이 속속 등장했다. 주재료는 고추장과 떡 그대로인데 떡볶이에 다양한 토핑을 올려 먹을 수 있고 배달 중심의 문화로 확산되면서 떡볶이 1인분이 몇 천 원이 아닌 2-3인분에 만 원이 훌쩍 넘어 예전에 비하면 고급 외식 메뉴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물론 맛도 더 있어지고 다양한 토핑이나 맵기 정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반갑지만 500원짜리 컵볶이 세대를 지나온 나는 떡볶이의 신분 상승이 괜히 아쉽기도 하다. 요즘 사람들이 옛날 떡볶이를 안 먹는 이유가 파는 곳이 없어서라는 우스갯소리도 인터넷에서 보았다. 동네를 다닐 때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떡볶이집이 어디에 있나 괜히 열심히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500원 컵볶이를 팔던 동네 분식집의 시대는 저물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시대가 되어버려 길거리 음식을 길에서 먹는 것조차 그리운 일이 되어 버렸다. 동네 떡볶이가 그리워서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유행이 또 돌고 돌아 다시 동네 떡볶이집이 대유행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괜한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