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굴광성과 인간 삶의 뿌리.
웬만한 나무는 물꽂이를 하면 쉽게 뿌리를 내리지만 고무나무는 유난히 까다로웠다. 잎이 햇빛을 보아야 줄기가 썩지 않고 뿌리를 내리리라 믿고 창가에 두었지만, 뿌리보다 잎만 무성해지다 결국 죽기 직전이 되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빛을 차단한 검은 병에 옮기고서야 흰 뿌리가 무성해져 새 화분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식물이 가진 근원적인 모순이자 생명의 신비를 보여 준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줄기는 빛을 향해 오르고, 뿌리는 흙 깊숙이 어둠을 향해 내려간다. 이 움직임에는 양의 굴광성과 음의 굴광성이라는 차가운 이름이 붙어 있지만 나는 이 상반된 방향성이 이루는 균형 속에서 뜨거운 인간의 모습을 본다. 우리 역시 빛을 받도록 드러내고픈 자신과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숨겨 두고 싶은 자신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흔히 빛을 향한 움직임에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더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괜찮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이 욕망이 줄기처럼 자신을 높이 들어 올리는 동안 다른 한편에는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와 열등감, 분노와 욕망이 뒤엉켜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깊이 묻어두면 사라질 것 같아도 그것을 자신이나 남에게서 마주할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올라온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방향 중 하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어둠 쪽으로 향하는 마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느냐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그림자』는 이 지점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학자는 맞은편 집 발코니에 호기심을 느낀다. 자신의 그림자를 그리로 보내며 돌아와 무엇을 보았는지 알려달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림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학자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에 관한 책을 쓰는 동안 자유가 된 그림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부와 권력을 키운다. 결국 주인 앞에 돌아와 그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 이야기 속 그림자처럼 통합되지 못한 인간의 어둠은 식물의 뿌리가 끌어올리는 힘과는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 뿌리는 줄기를 지탱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갈 뿐 결코 줄기의 자리를 빼앗지 않는다. 자연의 어둠은 전체를 살리기 위한 어둠이지만, 『그림자』 속 어둠은 주인을 대신해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어둠이다.
빛을 향한 자아만 남기려 하고 어둠을 향한 자아를 통째로 부정할수록 내 안의 어둠은 뿌리가 되지 못한 채 그림자로 일그러져 되돌아온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shadow)’는 자아가 받아들이지 못해 무의식으로 밀어 넣은 어두운 측면을 가리킨다. 억압된 분노와 열등감, 공격성은 사라지지 않고 왜곡된 형태로 표면 위로 솟구친다. 겉으로는 점잖은 신사이지만 억눌린 욕망이 결국 살인과 파괴로 폭발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지킬 박사는 이러한 그림자의 폭주를 보여준다.
융은 건강한 성장이란 이 그림자를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위로 끌어올려 인식하고 마주하며 통합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한다. 식물 한 그루 안에서 양의 굴광성과 음의 굴광성이 함께 작용하듯 우리의 내면에서도 빛을 향한 자아와 어둠을 향한 자아가 서로를 지탱하며 공존할 때 온전한 성장이 가능하다. 줄기만 길게 뻗고 뿌리가 얕으면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고, 반대로 뿌리만 깊고 줄기가 빛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면 생장은 왜곡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향한 움직임이 뿌리의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남에게 꺼내 보이기 어려운 감정과 욕망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들여다보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에 물을 대듯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면, 그것은 나를 무너뜨리는 그림자가 아닌 뿌리의 힘을 가진 그림자가 된다. 이러한 어둠의 힘이야말로 위로 올라가는 줄기를 지탱하는 힘이다.
빛만을 향해 곧게 선 줄기의 성장은 뿌리가 어둠으로 내려간 깊이만큼만 가능할 것이다. 캄캄한 바닥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나를 온전히 지탱해 주는 근원으로 나의 어둠을 끌어안아야 한다.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품고도 흔들리지 않는 힘과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력은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버티는 뿌리의 용기에서 온다. 오직 내 안의 어둠에 용감히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참고자료
안데르센,『그림자』, 현대지성, 2017
이부영,『분석 심리학 시리즈 1. 그림자(우리 마음속 어두운 반려자)』, 한길사, 2021
캘빈 S. 홀, 버드 J. 노드비,『융 심리학 입문』, 문예출판사, 2004
이복선,「식물에서 물의 수송과 생장에 대한 비유 학습」 교육논총 51.1 (2014): 19-32.
경기신문, 2021.04.21 내 안의 또 다른 나! 과연 누가 주인일까?
인천일보, 2021.05.05., 15면 당신을 위한 책한 권, 안데르센『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