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운영전』을 읽고
사람은 왜 금지된 것에 더 애가 타는 걸까. 가질 수 없고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랑은 왜 더 강렬한가.
『운영전』을 읽으며, 인간다움이란 결국 금기와 부딪히는 순간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생각에 닿게 된다. 금기는 단지 “하지 말라”고 선언하는 규범이 아니라, 그 선 너머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추는 거울임을 알게하는 소설이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뒤돌아본 죄로 그녀를 잃었다. 김 진사와 운영은 천상의 과일을 탐하다 신선의 자리를 잃고도, 인간 세상에서 다시 한 번 금지된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이 소설 『운영전』 역시 금기를 깨는 이야기를 담았기에, 작가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한문 소설로만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나니 저자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조선 후기의 서민이 썼다면 아마 한글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운영전』은 유려한 한시가 곳곳에서 마음을 흔들고 이중·삼중으로 촘촘히 쌓인 짜임새로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을 그려낸다. 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도 분명하게 살아 있다. 이런 빼어난 소설을 사대부의 언어로 그려낸 작가. 그 역시 해서는 안 될 일이기에 허락받지 못할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금기를 건너는 사랑을 써 내려간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마음은 김 진사와 안평 중 누구와 더 닮아 있었을까.
『운영전』을 읽으면서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건 운영을 향한 두 남자의 사랑이다.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지만, 결국 둘 다 자신에게 금지된 사랑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같은 사랑을 한 셈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운영이 도발하듯 마음을 드러낸 뒤에야 비로소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는 김 진사가 참 답답해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안평 역시 비슷하다. 그 역시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도 스스로의 자리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왜 그토록 운영을 사랑하면서도 취하지 못하고 또 끝내 그 사랑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지도 못했는지. 그의 수동적인 비극은 김 진사의 답답함과는 또 다른 슬픔을 안긴다. 그의 사랑은 김 진사처럼 얼굴이 축나고 살이 빠지는 열병처럼 겉으로 타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면의 고통마저 덜했다고 할 수 있을까.
책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의 시에는 그 마음이 숨어 있을 것이다. 『운영전』 속 안평은 시를 쓰는 자라기보다 시를 보는 자·판단하는 자·읽는 자로 그려진다. 보이지는 자가 아닌 보는 자는 언제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질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작품 안에서 직접적인 시의 목소리로 드러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에서 안평은 시대와 권위 그리고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부딪힘의 대상이 된다. 그가 만든 세계인 수성궁의 담장은 그 충돌을 눈에 보이게 하는 장치로 서 있다. 그 담은 운영을 가로막는 규율이자 금기의 경계이다. 그러나 정작 그 담에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세차게 부딪히고 있는지 그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부딪힘의 고통을 감당하면서도, 스스로는 끝내 질서의 편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 안평은 그런 인물로 남는 것이 슬펐기에 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눈이 가는 사람이 안평이었다.
여러 가지 물음 끝에 닿은 것은 결국 누구나 자기에게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는 사실이었다. 운영과 김진사는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들이었다. 누군가의 금기를 그들은 가질 수 있는 자들이었다. 운영은 다른 여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왕자의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 김 진사 역시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이니 원하기만 한다면 운영이 아니어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굳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욕망했을까.
아마도 금지된 것이야말로 내 안의 본질을 드러내는 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거울을 향해 손을 뻗고 싶은 욕구, 그 선을 넘고 싶다는 마음이야말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안평은 왕자로서 운영을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한 남자로서 운영에게 받아들여지길 기다렸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사랑 앞에서 무력한 한 남자로서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왕자로서는 운영이 안평의 금기가 아니지만 한 남자로서는 다른이를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은 허락되지 않는 금기가 된다.
운영 역시 궁녀의 신분으로 무모한 일탈을 감행하게 만든 그 가슴 뛰는 사랑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뜨거운 여인인지 스스로도 외면해 온 본능과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김 진사는 애끓는 사랑 앞에서 간사한 하인의 말조차 걸러내지 못할 만큼 눈먼 자신을 본다. 금지된 사랑은 이들에게 각자의 민낯을 보여준다.
잔인하고도 슬프지만 우리는 ‘저항’하고 싶어질 때 비로소 금기의 존재를 인식한다. 부딪힘을 느낄 때에야 그것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인간으로 사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떤 경계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가고 싶어질 때에야 비로소 내가 어디까지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금기는 욕망을 자각하게 하는 가장 매서운 장치이고, 금기를 마주하는 순간은 인간이 자기 안의 인간다움을 가장 뚜렷이 발견하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게 『운영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묻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금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왜 우리는 그것을 갈망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유독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일 수록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는 ‘금지된 것’의 자리에 서 있곤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겹쳐 있다.
운영과 김 진사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당대의 신분 제도가 인간의 본능을 어떻게 억압했는지를 본다. 안평의 사랑이 실패로 남음으로써 사랑이란 돈과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전해지는 이 작품의 운명을 통해 당시 신분 제도의 모순과 더불어 사대부 사회가 소설을 얼마나 폄하하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도 엿보게 된다.
금기는 깼느냐 못 깼느냐의 결과보다 깨려고 몸을 던져 본 시도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의미는 바위를 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란이 묻어 있는 그 바위를 사람들이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금기를 깨지 못한 것은 실패가 아닌 저항이기에 의미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운영과 김 진사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보여 준 사랑을, 궁녀들이 목숨을 거둬 달라 읍소하며 내보였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갈망과 친구를 향한 우정도 끝내 얻지 못할 사랑을, 놓지 못한 안평의 외사랑을 모두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이 이야기가 여전히 뜨거운 이유는 우리가 사는 모든 시대에 수성궁의 담장과 같은 보이지 않는 금기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담장은 조선 시대의 신분제일 수도 있고 현대 사회의 불문율이나 사회적 기대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안 된다'고 정해진 선에 몸을 던졌듯이 우리 역시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발견하거나 알리기 위해 벽에 부딪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금기의 경계를 인식할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 속에서 가장 뜨거운 생명력을 증명한다.
이제 나는 내 앞에 놓인 여러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 나이와 역할, 안전함을 이유로 스스로에게 그어 둔 선들 가운데 과연 무엇이 나를 지켜 주는 안전한 경계이고 무엇이 나를 가두는 차가운 금기인지 다시 묻고 싶다. 금기를 깨려는 그 용기 있는 외침이야말로 이름 없는 작가가 수백 년에 걸쳐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인간다움의 가장 뜨거운 이름이 아닐까. 나는 그 이름을 좇아 내 삶의 진정한 의미 있는 저항을 꿈꾸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