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산'책']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을 읽고 나서
특정한 기준에 미달이나 초과가 되거나, 규칙을 위반하여 자격을 잃는 것을 실격이라고 한다. 인간 됨됨이에도 실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속임, 배신, 자살,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 중독 등 좋은 인간이라는 기준에 미달되는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제목이 묘하게 끌렸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책 속 주인공 요조는 이런 요소들을 하나 이상 가진 사람들을 마주하며 연민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그들을 전혀 '거절'하지 못한다.
요조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완고한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밑에서 크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어릴 때 집에서 하인들에게 강간을 당한 적도 있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보금자리로 여겨져야 할 집조차 요조에게는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요조는 스스로의 예민하고 무기력한 본성을 감추고자 가면을 쓰고 광대짓을 자처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미술적 재능도 아버지가 허용하지 않아 미술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집을 나오게 된다. 미술학교에서 만난 친구 호리키, 무언가 결핍된 호리키와 어울리며 술과 담배, 매춘을 배우며 본인이 처한 현실의 고통을 회피할 수 있는 안식처로 여기게 된다. 요조는 무언가에 결핍된 약자의 여성에게 주로 끌렸는데, 만나던 유부녀와 동반자살을 시도하고 본인만 살아 남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믿어주는 요시코를 만나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결혼을 하게 된다. 잘 지내는듯 싶더니 우연히 요시코가 겁탈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럼에도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에 의존하며 지내던 어느 날, 약국집 미망인의 권유로 몰핀을 접하게 되는데, 그는 점점 몰핀에 중독되어 간다. 아버지에게 회생하겠다며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하지만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조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에서 자의든 타의든 상대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결핍된 사랑 때문일까? 술과 마약, 문란한 성생활 등에 대해서도 저항 없이 수용하게 된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스스로 지난 일들을 회고하며 의지했던 아내 요시코에게마저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요시코에게 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못한다. 결국 믿어온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수용되고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본인 모습으로 살지 않고 가면을 쓰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무저항상태로 살다 보니 본인도 모르게 그런 삶을 다 겪으며 살게 되었다. 어쩌면 요조가 상실한 것은 인간성보다는 자아정체성과 방향성이 아니었을까?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답을 저자가 책 속에서 직접 던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된다.
내가 주인공의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요조는 인간으로서 실격이었을까? 어쩌면 누구나 실격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 실격이란? 실격의 기준은 무엇일까? 실격이 되지 않은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일까?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던진 질문에 모두 답을 내리기엔 너무 어렵고 무거운 주제였다. 그렇지만 ‘타인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개인이 마주한 부조리함에 조금이라도 맞서 싸울 용기가 있었다면, 스스로 실격자로 여기는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들었다.
요조는 전적으로 신뢰를 주는 사람들에게 받는 사랑이 그리웠을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도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인간 실격이란 어쩌면 사랑의 부재가 초래한 부작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요조)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고, 한편으론 동정일까? 저렇게밖에 살 수 없는 요조가 안쓰럽기도 하고 공감되지 않는 스토리지만 또 '사실 요조가 타인을 헤치거나 피해를 준건 아니니까, 의지할 곳이 필요한것 뿐인데'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자꾸만 요조를 이해해보려고 하게끔 만들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나약한 면은 있다는 점에서는 인간적인 공감과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조가 호리키를 만나지 않았으면 차라리 타락하진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독서모임 멤버 중 한 분은 호리키가 없었으면 요조는 진작에 삶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고 답하셨다. 그것도 공감이 되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인간과 삶에 관한 내용의 책은 모두가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면 더 좋겠다.
이 책은 세계 2차 대전 폐전 직후 일본에서 쓰인 책이다. 민음사 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는데, 책 뒷편에 <다자이 오사무>의 작가가 살아온 이야기도 간략히 나온다.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번의 자살 시도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는 요조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고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라고 말하며 고백적으로 스토리를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 기억에 남는 문장 수집
인간은 서로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거나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양 평생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상대가 죽으면 눈물 흘리며 조문 따위를 읊어대는 것 아닐까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 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 버렸습니다.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기욤민지 브런치의 <일상산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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