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뜨끈한 미역국을 내 허벅지로 쏟았다. 화상정도는 아니었고 약간 열기가 느껴지는 정도였다. 그런데 내 반대쪽에 앉아있는 세사람 남편, 시어머님, 시아버님 누구도 내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휴지 뭉텅이를 쥐어주고 닦으라고 하고 시댁 어른들은 계속 식사 중이시다.
어 좀 섭섭하다. '어머님은 괜찮냐며도와주실 수도 있는데... 에잇,내가 뭘기대하는 거야...'
딱히 도와주실 일도 없었고 그냥 내가 치우면 됐다. 화장실에 가서 옷에 냄새가 빠지도록 치마를 물로 헹궈내고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분위기가 순간 경직 됐다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유연해졌는데, 아버님께서 '네가 예전에 결혼 직전에 당신께 편지 쓴 거 기억하냐며, 그때 그 편지 내용과 지금의 네가 다르다며'내게 불만이 아니고 '그저 솔직히' 말하는 거라며 이야기하신다.'그리고 전에 네가 이런이런 얘기도 한 적이 있다' 고.. 당신께서 분명히 들었다고..
내가 무슨 말로 변명해 봐도 '그건 아니라'며, 며느리인 내가 당시에 마땅히 하지 않아서 당신이 아쉬웠던 것을 말씀하신다.
폭력같았다. 내게도 설움이 있지만 윗분을 상대로 토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인들은 같은 가족이고 나만 남인데... 하필이면 앉은 구도도 3대 1 대치 중인 것 같았다. 쩔쩔매는 낮은 자세로 어색한 미소를 띤채 한편에 혼자 앉아있었다. 수세에 몰린 쥐였다.
'아 좀 외롭네'
어쩌다 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눈물을 흘리게 됐다. 눈물에 대한 어떤 이의 반응도 없었다. 옆에 있던 딸이 내 품속에 비집고 들어오며 '엄마 우는 거야?' 묻는다. 바보 같이 나는 왜 울었을까.. 왜 그때 눈치 없는 눈물은 흘러나와 버렸을까. 젠장 나 대문자 T인데
화가 치밀고 눈물이 그렁그렁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걸 눈을 치켜드며 숨을 참아가며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어색한 식사 후 시어머님 시아버님은 동백섬 산책을 가시고, 우리 네 식구만 남게 됐다. 해운대 골목에서 아이들이 풍선 터트리기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주체하기 싫어져서 자리를 피했다.
친구에게 sos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안도의 마음과 동시에,
와락.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버렸다.친구에게 일러바쳤다. 쟤네가 나를 이렇게 했다고.
"야... 나...흐엉............."
나는 해운대 골목길을 저돌적으로 돌진하듯 성큼성큼 걸었다. 바람이라도 가를 듯. 신기한 일이지. 흐르는 눈물도 마치 만화처럼 뒤를 향해 날린다.
전화기에 대고 오만가지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엉엉 아이처럼 울며 불며 눈물로 누빈다.
순간휴지가 내 시야로불쑥 들어온다.
나는 누군지 궁금해할 법도 하지만, 그게 누군지 확인할 생각도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마치 티슈통에서 티슈를 뽑 듯, 쓱ㅡ 휴지를 낚아채고 그것으로 눈물을 닦으며 전화기에 말을 쏟아부으며해운대 길을 파워워킹한다.
친구에게 속풀이를 있는 대로 하니 눈물은 다 흘린 것 같다.
"야... 근데 이 휴지 뭐냐?"
정신 차리고 보니 손에 쥔 휴지가 보인다.
"너무 웃겨 ㅋㅋㅋㅋ 누가 휴지를 준 것 같거든? 누군지도 모르겠고. 나 그냥 휴지를 뽑아서 가져온 것 같아. 그냥 티슈 뽑듯 가져왔어 ㅋㅋㅋ어머~ 이 사람 너무 고맙다. 누구지? 어떤 아저씨였는데.."
청승맞게 엉엉 울고 있는 아줌마에게 불쑥 나타나 휴지를 건네어 준 친절한 이사람은 누구일까?
그날의 울분은 불현듯 건네온 티슈로 싹 닦아버려야지 마음 먹기로 한다.
건네어 준 티슈와 불명의 친절한 안소니만 기억해야지.
'안녕, 울보 아가씨.' ' 꼬마 아가씨, 아가씨는 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예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