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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13. 2020

소주 한잔 합시다

  사람은 취하는 것이 많다. 향기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여인에 취하고 술에 취한다. 그 중 으뜸으로는 술을 꼽는다. 


  이모, 여기 이슬이 하나요. 늘씬한 여자가 엉덩이를 삐쭉이며 앞서 걷는 것보다, 그녀가 한쪽 눈을 끔뻑여 날리는 윙크보다, 그저 부르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올라올 것만 같은 이름. 바로 소주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인생의 문 앞에서 이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 걸까 아니면 저쪽일까 망설이는 이십대부터, 가정을 꾸리느라 제 취미는 모조리 빼앗겨버린 삼사십대, 정년을 코앞에 두었건만 명퇴로 목숨줄이 간당간당한 오십대, 다른 건 몰라도 주량만큼은 아직도 이팔청춘이라 믿는 육칠십대. 술을 팔고 있는 음식점에는 매일 밤마다 마시기도 전 소주 향기에 취해버린, 이미 거나하게 마시고 취해버린, 세상사 고달픈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민들의 대표 술, 소주. 도대체 소주의 매력은 무엇이기에 숨겨둔 애첩 사랑하듯, 이리도 하루가 멀다 하고 문턱이 다 닳도록 찾는 것일까. 


  기름이 사방으로 튀며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먹기 좋게 익어간다. 그러나 노릇노릇 잘 익은 삼겹살로 향하는 젓가락보다 소주잔으로 향하는 손이 더 바쁘다. 잔은 비워지자마자 다시 채워지고, 또 채워지기가 무섭게 비워진다. 인생이 고달프면 쓴 소주도 달게 느껴지는 법. 다디단 소주 한잔 나누며 때로는 고민상담이 오가고, 때로는 하소연과 푸념을 한숨과 섞어 내어놓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은 술안주로 그만인 삼겹살집으로 족발집으로 닭발집으로 매번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울하고 고민으로 가득 차 헛헛한 가슴을 달랠 때만 소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친구를 만나 몇 잔 기울이고 나면 취중진담이라, 속에 것까지 죄다 게워내게 되니 솔직함이 더해져 우정이 돈독해짐은 물론이요, 회식자리라면 분위기가 한층 띄워져 더욱 화기애애해진다. 동양에서는 술을 신선이 먹는 음식이라 했고, 그리스신화에서는 인간이 술을 마실 정신력과 술을 이겨낼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에게 별다른 놀이와 문화가 없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내려준 음식이 술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기꺼이 술을 가까이 하고 또 취해줘야만 하지 않겠는가. 


  소주가 도입된 시기는 고려시대 충렬왕 때로 알려져 있다. 중세기 페르시아에서 발달된 증류법이 아라비아에 전해졌고, 다시 원나라와 만주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다. 이름마저 소박하게 느껴지는 소주燒酒는 오래 전부터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이슬처럼 받아낸다 하여 노주露酒, 증기를 액화시킨 술이라 하여 기주氣酒, 빛깔이 희고 맑다 하여 백주白酒, 불로 가열한 술이라 하여 화주火酒, 몸에 땀을 내게 한다 하여 한주汗酒 등, 왠지 생긴 것과는 달리 고급스러워 보이는 이름을 많이도 가지고 있다. 거기다 자몽 복숭아 복분자 블루베리 유자 바나나 그리고 요즘은 파인애플까지, 이슬처럼 맑기만 했던 소주가 여러 가지 과일 향까지 덧입고서 새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소주를 찾는 이유가 다 가지각색이듯이 각 지역마다의 상표와 도수도 다양해졌다. 서울 경기는 참이슬, 강원지역은 처음처럼, 충북지역은 시원한 청풍, 대전충남지역은 맑은 린, 전북지역은 하이트, 광주전남지역은 잎새주, 대구경북지역은 참소주, 부산경남지역은 시원, 제주는 한라산. 서로 다른 도수를 자랑하며 각 지역의 대표 소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주욱 거슬러 올라가 소주의 기원부터 한껏 다양해진 이름까지 알아봤으니 이제 드디어 마셔볼 차례가 왔다. 이름이나 지역과 마찬가지로 마시는 법 또한 많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소주를 입맛에 맞는 안주와 함께 한 잔 두 잔 마셔도 괜찮지만 요즘은 섞어 마시는 소주가 대세다. 흔히들 말하는 폭탄주로, 칵테일소주다.


  먼저 소맥은 폭탄주의 기본 중 기본으로 소주 한두 잔을 맥주잔에 따라 넣고 나머지는 맥주를 부어 채운 후,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세로로 세워 잔 한가운데를 쿡 찍어주면 기포가 포르르 올라오며 골고루 잘 섞어져 맛있는 술이 된다. 깡소주로 마시는 것보다 훨씬 부드러워 소주를 처음 접하는 초보자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내강외유, 부드러움에 반해 자꾸만 마시다 보면 취하는 줄도 모르게 취하게 되니 조심해야 하는 술이다.


  고진감래주는 말 그대로 고생 끝에 낙이 오는 술로 다른 술에 비해 제조법이 조금 복잡하다. 일단 소주잔에 콜라를 채워 맥주잔에 넣고 두 번째 소주잔을 그 위로 올려 소주를 채운 후 나머지를 맥주로 채우면 된다. 이때 소주잔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술을 순서에 따라 부으면 웬만한 쇼보다 볼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것은 첫맛은 쓰고 끝맛은 단 것이 꼭 원샷으로 마셔야만 고, 진, 감, 래,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홍익인간주는 소주병에서 한 잔을 덜어낸 후 덜어낸 만큼 홍초를 넣어 섞어주는 것으로 다른 칵테일소주보다 알코올 냄새가 적다. 맛도 맛이려니와 붉은 빛이 살짝 도는 것이, 색깔이 예뻐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술이다. 그러나 한 잔 두 잔 과해지면 술빛이 아니라 얼굴빛이 붉어지며, 심지어 그 불그족족해진 볼 때문에 자신이 김태희 저리가라하게 예쁜 거 아닌가 한다든지, 원빈보다 잘생긴 거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올 수 있다.


  소백산맥주는 맥주잔에 소주와 백세주 산사춘 맥주를 각각 한 잔씩 똑같은 비율로 섞어낸 술로 네 가지의 술이 섞인 것인 만큼 도수가 세다. 평소 얄밉지만 티 낼 수 없었던 사람에게 권하는 술이기도 하다. 그러니 누군가가 지금 술을 종류별로 시키고 있다면 좋아라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상대방에게 무엇을 그리도 밉보였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소메리카노라고도 불리는 소원주는, 이 술을 마시고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술이 아니라 소주와 원두커피를 섞는 것이다. 씁쓸한 소주에 씁쓸한 커피가 섞였으니 당연히 쓴맛이 나지만 커피의 그윽한 향으로 인해 자꾸만 손이 가는 술이다. 커피를 즐겨하는 이에게 추천하는 술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커피향이 진동할 것이다.

  에너자이저주는 커다란 생맥주잔에 얼음을 가득 채운 뒤 소주잔으로 파워에이드 두 잔과 핫식스 한 잔, 그리고 소주 한 잔을 섞어 마시는 술이다. 에너지드링크가 들어있어 팔굽혀펴기를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셋 해도 끄떡없는 에너자이저처럼 밤새 술을 마시는 게 가능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밤새 술을 마셔버릇하면 에너자이저가 아니라 알코올중독자가 되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쭈쭈메로나주는 생맥주잔에 메론 맛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넣고 소주 두 잔을 넣은 다음 나머지를 사이다로 채운 후 아이스크림이 다 녹을 때까지 잘 저어 마시는 술이다. 알코올 성분이 적고 부드러운 멜론 색을 띠고 있어 어린이들이 마시는 음료 같은 느낌이 나지만 역시나 술은 술, 많이 마시면 두 발이 아니라 아기처럼 네 발로 집에 기어들어가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모든 술은 선, 적당한 선을 지키며 마실 줄 알아야 한다. 그 선 안에서 즐기고 끝을 낼 줄 안다면 굳이 주도를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술은 신이 내린 음식의 완전한 완성이 된다. 갈 지之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말짱하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목구멍으로 넘겼던 안주를 눈으로 다시 확인하지 않을 때까지만, 목에 맸던 넥타이가 이마에 둘러져 있지 않을 때까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간밤의 일들이 고스란히 기억날 수 있을 때까지만 마시는 게 좋을 듯하다. 아무리 불같은 금요일 화끈한 토요일이 매 주 끝자락에 서서 우리에게 무심히 지나치지 말아 달라 애원할지라도. 그러니 그대, 오늘밤은 나와 함께 소주 한 잔 어때요. 딱 한 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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