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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13. 2020

호상好喪


  산언저리에는 철놓친 아카시아가 군데군데 몇 송이 남아 미련 가득하게 아련한 향을 내뿜고 있을 적, 시내에서 외떨어져 있는 그곳에는 신명이 흠향하라며 피워놓은 은은한 향내가 곳곳을 메우고 있었다. 가까이 지내던 지인의 아버지가 그리 쉬이 가실 줄 몰랐기에 부음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한 길이다.


  구순을 겨우 한 해 남기고 고인은 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울며불며 통곡하는 이 하나 없는 건 고사하고 그간에 소원했던 일가친척들이 반가워 나누는 인사로 오히려 왁자지껄한 잔칫집 분위기다. 향을 피워 꽂는 동안도, 절을 하는 동안도, 주변에는 우는 이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설핏 들리는 옆 호실의 통곡소리에 지금의 이 자리가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픈 자리임이 분명하구나,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에 젖어서인지 좀처럼 눈물은 나지 않았다.


  상복조차 거부한 채 편안한, 심지어 목 부분에 몇 개의 반짝이가 붙어있는  티셔츠와 바지차림을 한 고인의 부인. 편안하게 가셨다며 싱긋 웃어줄 여유까지 보이는 자식들. 찾아오는 이들마다 유행가 읊어대듯 튀어나오는 잘 죽었지 잘 죽었어, 하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들. 금이야 옥이야 예쁘다했을 손자들마저도 저쪽 구석에서 저들끼리 휴대전화기를 들고 킥킥대며 게임에 열중이다.


  이 같은 상황이 못내 서운했음일까. 비스듬히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로 인하여 볼 살 하나도 없이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움푹 들어간 커다란 눈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문상객들을 쏘아보는 듯하다. 하얀 국화꽃 속에 파묻혀서도 고인은 불쑥 화가 났나 보다. 


  그가 이제 곁에 없게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호상이라며 그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 속으로야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조금쯤 있는지 모르지만 십 년 넘게 거동도 제대로 못하며 부인과 자식들을 힘들게 했으니 이제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편안하게 되었다며 가벼이 입을 놀린다.


  삭풍을 맞은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을 내밀어 반겨주던 얼굴이 아직도 선하건만, 선뜻 그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다. 


  “답답하다며 온 방의 창문을 다 열라고 해놓곤 자는 듯이 그냥 가더랍니다.”


  “죽는 복은 타고 났구먼, 그려.”


  “이제 이 집 자식들 고생 다 끝났네요, 호상이야.”


  “그럼요, 호상이고말고요.”


  인사를 나눈 후 고인에 대한 대화는 어디나 할 것 없이 호상이라며 끝을 맺었다. 이내 옆 호실의 자살했다는 젊은 남자 이야기, 또 그 옆에 교통사고로 안치된 여중생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런데 고인을 말할 때는 무심하리만치 담담하던 그들이 오히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옆방의 고인들에게는 젊은 사람들이 안됐다고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아휴, 어린 자식을 보내놓고 그 부모들은 오죽 가슴이 아플까.”


  “아, 익은 감도 떨어지고 선 감도 떨어진다고 하지 않습디까. 다 자기 명만큼 살다 죽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양반은 명이 좀 길긴 했지. 익은 감도 아니고 곶감이라니까.”


  호상이라는 것이 살아낸 시간의 길고 짧음의 차이로 결론지어져 불리는 것이던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고인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삼천포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닌 몇 십 년 전에는 환갑만 넘어도 오래 산다고 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이겨내야 했고, 보릿고개로 인해 굶주림을 밥 먹듯 해야 했기에. 그래서 환갑만 넘어도 장수한다며 자손들은 성대하게 잔치를 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예순은 경로당 출입도 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일흔은 막걸리 심부름이나 하는 막내요, 적어도 여든은 넘어야 윗목도 아랫목도 아닌 중간에 겨우 앉을 수 있다고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겨우 구순을 앞두었을 뿐인 사람이 죽었는데 호상이라 말하고 있다. 


  호상이란 것이 정말 있을까.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아무리 모진 병마와 사투하느라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았다고 해도, 자는 듯 생을 마감하여 죽는 복까지 타고났다 해도, 이렇게 모두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데 과연 호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좋을 호好에 죽을 상喪. 뜻이야 복을 누리며 오래 산 사람이 죽은 상사라지만, 기쁜 죽음이라니. 꽃 속에 파묻힌 고인의 얼굴이 이젠 화가 나 보인다기보다 오히려 애처로워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입관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관계자가 알려왔다. 한참 지나 입관식을 마치고 돌아온 부인과 자식들의 눈이 퉁퉁 부은 채 버얼겋다. 그제야 이별을 실감한 듯싶다. 


  이별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언제고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슬픈 자리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준비한 자라 할지라도 슬픔을 덜어내는 과정이 어떠해야 한다는 명확한 답은 없다. 그렇기에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슬픔을 삭혀간다. 어떤 이는 가슴이 헐어질 만큼 마냥 슬퍼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떠난 이와 함께 했던 곳을 찾아가 추억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래야지만 가슴에 맺혔던 슬픔이 눈물에 삭고 삭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점점 작아질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영원히 떠나보낸다는 것, 이별은 이토록 크나큰 아픔이기에 절대 호상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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