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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13. 2020

부 부 전 상서 夫 父 前 上書

  노오란 봄볕이 좋아 거실에 앉아 콩을 고르며 아이들 생각을 합니다.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바람이 살랑 불어 통박을 주네요. 덕분에 이마 위에 가지런했던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통에 자꾸만 눈을 찌릅니다. 눈물이 납니다. 늙어서인지 별일 아닌 일에도 핑계를 두어 허구한 날 눈물바람입니다. 이런 날이면 머리를 가만히 귀 뒤로 넘겨주며 나를 아꼈던 당신이 덧없이 그리워집니다. 그러자면 문갑 위에 있는 거울을 당겨 얼굴을 살펴보고 주름이 가득해져 있음에 한숨을 한 번 내쉬기도 하지요. 언젠가 만나게 되면 당신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영겁처럼 느껴지던 세월이 흘러 얼굴이 쪼글쪼글하기에, 그것 또한 걱정입니다. 그래도 아직 머릿속은 그때 그대로여서 당신 보내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지요. 지금 생각해도 그날은 참 무섭기만 합니다. 


  그 밤 당신은 누렇게 황달이 온 두 눈을 들어 나와 마주한 후 손을 꼭 붙잡고서 말했지요. 당신 나이가 너무 아까워서……라고. 끝맺지 못한 말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보다 이제 막 서른 줄을 넘은 내 나이가 뜬금없이 무에 그리 아까울까 했는데 다음 날 당신은 홀연히 떠나버렸지요. 그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습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은 어쩌라고, 막내가 겨우 네 살이었는데 걱정도 안 되는지 다른 어떠한 당부도 없이 당신은 그저 내 나이만 안쓰러워했어요. 


  한창 모내기로 바쁜 사월. 새벽 한 시쯤 잠시 졸던 참에 꿈자리가 하도 흉흉하여 깨어보니 당신이 이상했습니다. 눈이 뒤집혀 흰자위만 보이고, 여보! 여보! 당신을 불러도 자꾸만 허공에 손을 휘젓기만 할뿐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내 목소리에 놀라서 깬 아이들도 모두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래선 안 되지. 너무 무서웠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침착하게 큰딸아이에게 물 한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오라 시켰습니다. 고개를 받쳐 안고 숟가락으로 물을 떠서 넘기게 했어요. 한 모금, 그리고 또 한 모금, 천천히 두 모금까지는 넘겼는데 세 모금 째는 그대로 흘러내려버리더군요. 


  쩔그렁. 힘없이 늘어진 당신처럼 내 온몸의 기운도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그만 물그릇을 놓쳐버렸습니다. 침착해야 하는 것을 잊고 다시금 무서움이 찾아왔습니다. 느그 아부지 숨을 안 쉰다. 물을 못 넘기신다. 돌아가싰는갑다. 그 말에 아이들은 엉엉 울어 젖히는데 나는 답답하기만 했어요. 숨을 안 쉬고 있는 당신이 답답할 것을 생각하니 더 답답했어요. 차갑게 식어가는 당신의 체온도 느껴지고, 다시는 뜨지 못할 두 눈이 꼭 감긴 것도 내 눈으로 보이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홰치며 닭이 울어대서야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 목을 끌어안은 채 넋을 놓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지요.


  그나마 온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있었습니다. 그제야 수습이 시작되었지요. 사잣밥도 동네 어르신들이 모아준 쌀로 겨우 올릴 수 있었습니다. 마당에 커다란 상을 펴서 세 그릇의 밥, 물, 소금 그리고 짚신 세 켤레를 올려놓고 절을 한 후 목청껏 아이고아이고 곡을 했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독하다고 수군대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내 처지가 기막혀서 남들 눈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거든요. 심지어 싸랑께에 세 그릇이나 되는 사잣밥을 엎어 놓으며 아이들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을 여기에 쏟지 않고 끓여내면 우리 다섯 아이들 한 끼는 너끈히 날 수 있겠다고.


  당신을 데려가는 것도 야속한데 아이들 밥까지 빼앗아 가는 것 같아 저승사자를 붙잡고 통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도 안 볼 때 묻은 흙을 털어내고 치마폭에 숨겼다가 아이들에게 끓여줄까 싶어 한 덩이를 들고 주위를 살피려 고개를 돌렸습니다. 감나무 밑에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있더군요. 그중 벌떡 일어선 막내딸아이가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 죽어서 떡 했다고, 부럽지 않느냐며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힘없이 또 밥 덩어리를 놓쳐버렸습니다. 저리도 철없는 아이를 나 혼자 어쩌라고 그리 갔습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눈물로 보내야만 당신에게 원망한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는 겁니까. 당신이 떠난 날이 처음으로 당신이 미웠던 날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첫 번째 기일. 그때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가난해져서 제사상도 겨우 올리는 형편이었습니다. 애호박 부침개 몇 장, 막걸리 한 사발이 전부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요. 당신이 좋아하던 생선 한 토막 올리지 못해 미안했지만 아이들과 살아내느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곤하게 잠이 든 큰아들아이를 흔들어 깨워 절을 시켰더니 두 번째 절을 하다가 엎드린 채로 다시 잠이 들더군요. 윗방에다 겨우 옮겨 눕히고 돌아와 안방에 나란히 누운 고만고만한 나머지 네 녀석들을 보니 년 전에 흐르지 않던 눈물이 그때서야 쏟아졌습니다. 제대로 통곡을 해보았습니다. 꺼이꺼이 한참을 울어도 어째서 당신은 따뜻한 눈길 한번 건네주지 않는 겁니까. 눈물 콧물 쥐어짜도 어째서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이렇게 과부로 만들어 놓으려고 나를 그리 예쁘다, 곱다 하며 데려왔습니까. 울며울며 가슴을 치던 밤이었습니다.


  헌데 다섯 자식들 키우다보니 그날보다도 더 많은 눈물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형편이 되지 않아 큰딸과 둘째딸을 고등학교가 아닌 공장에 보내던 날도, 누룽지라도 얻어다가 한 끼 걱정 덜어볼 심산에 식당 설거지를 하느라 한 번도 함께하지 못한 졸업식 날에도, 딸 셋 모두 결혼식장에서 아비 없이 신부 입장을 할 때도 숨죽여 울었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아이들이 속을 썩일 때는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복도 없다더니, 내가 딱 그 꼴 아닌가 하여 가슴을 쥐어뜯으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닮아 순하고 똑똑한 우리 아이들. 내 도움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공부도 잘 마치고, 다들 제 짝을 만나 알콩달콩 잘 사는 모습까지 보여주니 이제는 남부러울 게 없답니다. 별 탈 없이 잘 자라준 아이들의 기특한 모습, 당신도 다 보고 있었지요.


  세상의 모든 색깔이 모이면 까만색이 되듯 당신을 향한 오만 감정이 쌓이고 쌓여 가슴이 까맣게 타다 못해 하얗게 바래진 나날들을 숱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한 귀퉁이부터 갠다는 말이 있지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미움도 원망도 점점 작아지더니 이제는 다 삭아지고 남은 것이라곤 그리움뿐입니다. 지금은 당신이 무척이나 보고 싶습니다. 여보, 보고 싶어요.    



  오늘은 아버지를 뵙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롯이 다섯 남매만 길을 나섰습니다. 온 산이 아카시아 향으로 뒤덮여 정신이 혼미할 정도이건만 아버지의 집은 홀아비 냄새만 폴폴 풍깁니다. 또한 집 구석구석 살뜰히 살피는 손길이 잦지 않아 좁디좁은 마당을 온갖 풀들이 어지러이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두 오빠들은 챙겨온 낫을 들어 집수리부터 서두릅니다. 오뉴월에 땀까지 흘리며 잡초를 뽑고, 깊은 곳까지 뻗어 내린 나무뿌리를 캐내는 것이 힘에 겨울 텐데도 이제 벌초하는 일도 없겠다며 낫이 향하는 손길에 정성이 가득합니다.


  마지막 집수리를 힘겹게 마친 후 아버지께 정식으로 예를 드립니다. 예전 아버지께서 작은오빠에게 양은주전자를 내밀며 한 되만 받아 오라 시켰다던 막걸리를 가장 먼저 비석 앞 정중앙에 한 잔 올립니다. 그 앞으로 몇 가지 과일과 포를 접시에 담아 올린 다음 줄지어 서서 큰절을 두 번이나 올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휑한 바람 한 점이 전부입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도록 마른 손목 한 번 내어주시지 않는 아버지는 오늘도 ‘반갑구나. 오느라 애썼다.’하는 겉치레 인사도 없이 무뚝뚝한 표정입니다. 버선발로 달려 나와 반기는 것을 바란 적도 없는데 아버지의 무심함은 매번 서운함을 불러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흑백사진 속의 이목구비 선명하고 잘생긴 젊은 시절의 남자가 아닙니다. 그저 외딴곳에 덩그러니 혼자 외롭고, 초가지붕처럼 둥그런, 그저 잔디에 뒤덮인 흙더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월의 하루, 오늘만은 아버지도 여지없이 평범한 가장의 넉넉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잔치를 열어 우리 가족을 모두 불러 모이게 하거든요. 작은오빠는 하루 종일 큰 웃음소리를 달고 다니더니 기어이 통 큰 한 마디를 외쳤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이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면서요. 주방에서 나물을 볶던 큰언니부터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담당했던 저까지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집 안팎에 까르르 웃음이 넘치는 것 또한 아버지 덕입니다.


  짭조름하게 간수에 담가두었던 조기에 고명을 얹어 구수하게 쪄내고, 쿰쿰하게 삭힌 홍어도 어슷하게 칼집을 넣어 달걀물을 입힌 다음 노릇노릇하게 부쳐냅니다. 시작은 늘 살아생전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생선음식 장만부터지요. 특히나 조기와 홍어는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셨으니 아마도 젓가락이 향하는 첫 번째 접시일 거라며 어머니는 떡을 괴듯 층층이 높게도 쌓아 올립니다. 이제 이러한 날은 없을지도 모르기에 이처럼 더 넉넉하게 많은 양을 준비하느라 식구들 모두가 정신이 없습니다.


  올해로 아버지가 가신지 꼭 마흔 해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계신 곳에, 아버지의 아버지,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모셔진 그곳까지 공장이 들어선다며 이장移葬을 요청해왔습니다. 종중에서 선산을 팔아치운 탓이지요. 어머니는 쉽게 승낙했습니다. 한 집안에 외며느리로 들어와 지금까지 일 년에 제사만 열두 번도 넘게 치렀다며, 너희들에게는 이렇게 힘겨운 일들을 남기고 싶지 않다며, 오히려 잘 됐다며 그러마고 하셨답니다.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것도 아니고 가루로 만들어 절에 모시고 싶답니다. 더구나 앞으로는 집안에서 기름 냄새 풍기며 음식도 하지 않고 절에서 하는 의식만으로 치러낼 생각이랍니다. 말로는 지긋지긋하다 하셨지만 아마도 아버지를 더 자주 뵙고 싶은가 봅니다. 산소에는 자주 찾아가지 못하지만 절에는 달이면 서너 번을 가시니까요. 저 또한 풍경소리 그윽한 그곳에 아버지가 계신다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것도 같습니다.


  모셔진 절에서 누군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절하는,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음에도 유독 고운 자태의 아낙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어머니일 겁니다. 그러면 얼른 따라나서세요. 언제나 외롭지 않게 토닥토닥 등 두드려 주면서 그간의 눈물겨운 하소연도 들어주고 다 못한 사랑도 나누시길 기원합니다.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그동안 혼자 지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 잊지 말고 해주셔야합니다. 마흔 해나 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부 딱지 붙이고 살아온 어머니의 눈물을 누가 말끔히 닦아줄 수 있을까요. 아버지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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