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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13. 2020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여름이 무르익고 장마가 시작되면, 창밖으로 주룩주룩 쏟아지는 장맛비를 가만 보고 있노라면, 그 빗소리에 갇혀 온 사방이 고요로 잠길 때면, 어릴 적 엄마가 부쳐주던 애호박 송송 썰어 넣은 부침개가 먹고 싶은, 추억이 고픈, 그런 날이 있다. 느른한 물비린내와 수다스러운 빗소리, 그리고 그 빗소리를 꼭 닮은 부침개 지지는 소리가 더없이 생생해지는, 그런 날이 있다.


  후둑후둑 후두둑. 빗소리가 처마 끝까지 매달린 것을 보니 장마가 시작된 듯했다. 얼마나 많은 빗물을 쏟아내려는 것인지 지난밤에는 한 번씩 대낮처럼 환한 빛을 내기도 하며 우르릉 쩍쩍 천둥번개소리가 유난히도 요란했었다. 행여 간밤에 내린 비로 벼가 다 잠긴 건 아닐까, 거셌던 비바람에 고춧대가 우르르 무너진 건 아닐까. 


  걱정으로 밤새도록 깊이 잠들지 못 하고 뒤척이던 엄마는, 기어이 우산도 우비도 없이 얇디얇은 몸빼 차림으로 삽 하나만 챙겨서 새벽부터 논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아침나절도 무심히 보내버리고, 잠시잠깐 수그러든 비로 인해 희뿌연 물안개가 낮게 퍼지는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물비린내를 폴폴 풍기며 돌아왔다. 아마도 고샅에 있는 논뿐 아니라 안산밖에 있는 고추밭까지 바지런히 물꼬를 터주고서 물길이 제대로 났는지 지켜보느라 끼니때가 지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빗물에 푹 절은 채로, 한여름에 오들오들 떨며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돌아온 엄마는 따로 씻을 것도 없이 말갛게 씻긴 삽을 헛간에 세워두고서 곧장 시암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처마 밖으로 밀려난 시암에서 또 다시 비를 맞으며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진흙을 씻어냈다. 대충 감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손으로 몇 번 툭툭 털어내고는 잠시 쉴 틈도 없이 토방에 벗어던져두었던 몸빼바지 주머니에서 푸릇한 것들을 꺼내놓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어찌 저리 많은 것들을 주머니에 챙겨 넣을 생각을 했을까. 그러잖아도 젖어서 척척 달라붙었을 옷에 많이도 담아왔다. 빼곡한 넝쿨 속에서 겨우 찾아냈다는 애호박이며, 빗물에 쓸려 넘어져버린 고춧대에서 따냈다는 풋고추며, 이제 겨우 한 뼘 정도 자란 솔이며, 와중에도 자식만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시암 바닥에 한 가득이다. 


  커다란 함지박에 시원한 펌프물을 퍼 올려 그것들을 뽀득뽀득 소리 나게 씻은 다음 양푼에 가지런히 담아놓고서야 내내 쭈그렸던 허리를 편다. 굳이 쿰쿰하고 눅눅한 부엌으로 들어갈 것도 없다. 도마와 칼을 챙겨와 빗소리에 고즈넉이 갇혀버린 마루에 앉아 송송송 채를 써는 손이 바쁜 걸 보니, 엄마는 그제야 허기를 느낀 모양이다. 양푼 한가득 채 썰린 푸성귀에 밀가루를 붓고, 거기에 가끔 아주 가끔 도시락 한 귀퉁이에 숨겨 싸주던 달걀도 두어 개 톡 깨서 넣는다. 휘적휘적 국자로 반죽을 잘 섞었을 즈음에는 어서 기름질을 하라고 채근하듯 잠깐 수그러들었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졌다.


  드디어 부쳐낼 차례다. 아궁이에 걸린 가마솥을 뚜껑만 남긴 채 솥만 덜렁 들어내고 뚜껑의 손잡이가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다시 아궁이에 걸쳐 놓는다. 그러면 커다란 프라이팬이 만들지는 것이다. 대충 주물럭거려 구겨진 신문지에 불을 붙여 아궁이에 던져놓고 그 위로 맵저를 한 꺼풀 흩뜨린다. 풀무를 톨톨 돌려가며 맵저를 또 한 주먹씩 얇게 흩뜨린다. 묘똥 위 도깨비불처럼 둥그렇게 쌓인 맵저들이 빨간 불씨를 반짝이며 뚜껑을 잘 달궜을 때, 들기름 한 숟갈을 싸악 두른다. 그리고 반죽을 국자로 가득 떠서 한 바퀴 휘, 둘러주면 금세 어젯밤 만나지 못했던 커다랗고 동그란 보름달이 떠오른다. 치이익 지글지글 톡톡, 이내 온 집안 가득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넓적한 채반에 낭창낭창한 달이 한 장 두 장 쌓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굳이 엄마 옆을 서성이며 쩍쩍 입맛을 다셔댔다. 


  헛헛한 엄마 속은 나 몰라라. 토독토독, 빗소리인지 기름이 튀는 소리인지 서로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는 그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곧 두 소리를 구별하여 듣는 것도 흥미를 잃고 만다. 그저 눈앞에서 익어가는 맛난 부침개에 침 흘리며 언제나 저 커다란 달을 꿀꺽 삼킬 수 있을까, 애가 탈 뿐이다. 뜨걸 때 먹어야 제 맛잉게 언넝 먹어라, 하는 엄마 말이 떨어지자마자 채반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앉아 노릇노릇 구워진 부침개에 너나 할 것 없이 서둘러 젓가락을 얹는다.


  한 점 뜯어 젓가락으로 들고 후후 불어도 열기는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입에 넣고는 금방이라도 뱉어낼 듯 씹을 듯, 한 번씩 허어허어 노란 새끼 새의 부리 같은 입을 벌려가며 식어지기가 무섭게 냉큼 삼키고 또 다시 채반으로 팔을 뻗는다. 그러자면 엄마는 진즉부터 주렸던 허기는 잊고서 제비새끼 같은 우리를 바라보며 빙긋 웃기만 했다. 


  지금처럼 끝도 없이 비가 쏟아질 때면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빗물로 옴푹옴푹 팬 웅덩이에서 오빠와 함께 말간 웃음을 달고 잘박잘박 물장난 치고 싶은 날이 있다. 눅눅해진 방을 덥히느라 굼불 때는 아궁이를 쑤석거려 잘 익은 하지감자를 찾아 새까만 검댕 묻혀가며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가 청청하게 들리는 마루에 앉아 언니오빠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날이 있다.


  오랜만에 밭일을 쉬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빗소리에 언뜻언뜻 묻어오는 자장가로 낮잠 들고 싶은 날이 있다. 뜨뜻한 부뚜막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저녁 짓느라 바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날이 있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낮게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엄마가 부쳐주는 노릇하고 바삭한 부침개가 먹고 싶은 날이 있다. 그렇게 어리고 어렸던 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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