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명주 Oct 22. 2020

가로등

  늦은 귀가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번쩍이는 간판 불빛만으로도 걷기에는 충분하건만 그는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점점이 빛을 더하며 오롯이 길잡이가 되어준다. 오늘처럼 소륵소륵 함박눈이라도 내릴라치면 무슨 이야깃거리가 그리 많은지 신이 난 어린아이마냥 송이마다 사연을 담아 재잘재잘 말동무 해주는 것은 덤이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오늘도 수고 많았다고, 어서 들어가 쉬라고 참았던 인사를 건네며 나를 제일 먼저 반기는 것도 분신처럼 꼭 닮아있는 또 다른 그다. 더구나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지켜 서서 후미진 골목 안까지 비춰주니, 내 뒤의 안전까지 책임지는 보디가드를 하나 채용한 것처럼 마냥 믿음직스럽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지금쯤 엄마도 그의 따뜻한 주홍빛을 받아 부서지며 쏟아지는 하얀 눈을 바라보고 있겠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객지의 자식들 보고픈 마음을 다만 ‘참 예쁘다’를 연발하는 것으로 대신하며 소녀 같은 눈망울로 반짝반짝 보고 있겠지. 어릴 적 나를 기다리던 그 모습으로. 예전 그는 내가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동안 엄마와 부쩍 친해져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면 어둑해진 길은 나에게 서둘러 집으로 가라고 재촉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이미 음산한 어둠이 짙게 깔려있고 띄엄띄엄 있는 불빛이 전부인 한적한 시골길. 그것마저도 드문드문 있을 뿐이어서 무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 희미한 불빛이나마 멀어질 쯤에는 전에 본 ‘전설의 고향’에서처럼 내 다리 내놓으라며 귀신이 쫓아올 것도 같고, 뉴스에서 본 험악한 인상의 범인이 툭하고 튀어나올 것도 같아 머리가 쭈뼛 서는 한기에 떨며 바쁜 걸음을 내딛었다. 


  뒤통수를 잡아끄는 무서움을 겨우겨우 털어내고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대문을 덜컹 열고 들어서자,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인지 엄마의 초점 없는 눈이 먼저 나를 반겼다. 가방을 내려놓고 조용히 엄마 옆으로 다가갔다. 눈동자가 향한 곳이 대문 밖에 서있는 그였는지 아니면 그 너머로 다른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애잔하고 안쓰러워 그저 꼬옥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엄마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었다.

  그는 무어라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을까.


  마루에 나와 앉아 그와 말없는 대화를 하고 있던 애잔한 엄마의 모습은 내 가슴에 아프도록 진하게 박혔다. 처음으로 엄마도 외로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 때는 그 눈에 무엇을 담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그리는지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라면 너무도 일찍 멀리 가버린 아버지가 아닐까 어설픈 짐작만 할뿐. 


  이듬해 그는 또다시 엄마와 나를 서로 보듬게 했다.  


  여고 졸업 후 늦가을 어느 날 아침 엄마와 심한 말다툼이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학원을 해보겠다고 우긴 것이다. 매 한 번 들지 않던 엄마에게 끝내 등짝을 한 대 맞은 후 무슨 객기인지 모르지만 그길로 집을 나와 버렸다. 하지만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가출은 만 하루도 안 되어 어설프게 끝나버렸다.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헤매다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덜컥 겁이 나서가 아니라, 그가 애타게 나를 불러서다.  


  멀리서도 우리 집만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기와지붕이 달빛을 받아 제 빛이 아닌 뽀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엄마가 집에서 밝힐 수 있는 등이란 등을 모두 다 켜고 마당을 서성이며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생각하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럽고 서운하던 마음이 저 멀리 달음질쳐버렸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주책없이 겅중겅중 뛰어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리도 좋아서 달려왔건만 대문은 닫힌 채이고, 따뜻하고 노란 빛이어야 할 창호지문에서는 새어나오는 빛 한줄기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물론 마당에서 서성거리는 엄마도 없었다. 멀리에서 보이던 따뜻한 불빛이 엄마가 하염없이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느라 밝혀둔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야속한 그였다.

  시치미를 뚝 떼고 늘 집 앞 그 자리에서 제 할 일은 그게 다라는 듯 눈을 켜고 서있는 그가 나를 속였다. 그와 한통속인 엄마는 나라는 존재를 아예 잊고 편하게 잠이라도 들었는지 어두운 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반소매 사이로 스며들어 오소소 소름이 돋게 했다. 아까보다 더한 서러움이 머릿속을 꽉 채워갔다. 바람도 차갑거니와 세상에 나만 내동그라진 듯한 허전함이 웅크린 자세를 더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저 멀리서 부르더니, 오라고 손짓하더니, 이렇게 홀대하는 그에게 되갚아 주고파서 차갑게 흘겨주었다. 


  마당을 지나고 삐걱거리는 마루를 걸을 때만해도 나는 분명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였다. 하지만 안방을 지날 때는 나도 모르게 뻔뻔함이 생겨 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휑하니 내 방으로 향할 생각을 잊었다. 엄마의 숨소리가 나를 부르는 듯해 안방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내내 서럽기만 하던 마음을 잊고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가 그대로 이불을 들춰 엄마 품으로 쏘옥 들어갔다. 


  엄마는 자고 있지 않았다. 자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팔 힘에서 알 수 있었다. 처음의 내 생각이 맞았다. 그도, 엄마도 애써 말을 삼킨 채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엄마 품에 안겼을 때에야 알 것 같았다. 엄마가 비님 오시는 날, 눈 내리는 날, 환히 빛나는 그의 너머로 그리며 눈에 담았던 것은 손에 닿지 않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그리고 언니오빠라는 것을. 행여 넘어지지 않을까,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이제껏 으슥한 밤길을 걱정해주던 등롱은 어쩌면 엄마의 눈과 마음이 가로등의 모습을 하고서 환히 빛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나도 그때 엄마의 마음이 되어본다. 아들아이가 오는 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환하게 웃는 얼굴로 불 밝히고, 피곤이 저 멀리 달아날 만큼 재미난 이야깃거리 챙겨서 버스정류장을 서성여본다.      

작가의 이전글 난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