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명주 Nov 02. 2020

시장통 칼잡이

     

  카우보이모자를 쓴 사내가 드넓은 초원이 아닌 골목골목 좁디좁은 시장바닥 한구석에서 말을 달렸다. 

  “자, 보세요. 갈치 꽁치 삼치 넙치 가물치 고등어, 다 한 방에 자를 수 있습니다. 오징어 문어, 냉동실에서 돌처럼 꽁꽁 얼어버린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도 이 칼만 갖다 대면 무조건 다 잘려요. 어라, 갖다 얹기만 했는데도 막 잘리네? 이 칼이 이렇게 좋다니까.”


  칼은 그의 말이 되어 더그덕더그덕, 커다란 도마 위를 날래게 달렸고, 칼발굽 소리가 시장통을 울릴 때마다 양배추도 당근도 무도, 심지어 고깃덩이도 숭덩숭덩 썰려나갔다.


  칼은 말이 아닌 총 대신이 되기도 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는 총을 들고 있었는데 그는 칼을 손가락에 끼고서 총잡이처럼 권총을 돌리듯 뱅그르르 돌리는 쇼를 보여주기도 하며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걸까. 괜한 걱정을 하던 차에 보란 듯이 그는 헐떡거림 한 번 보이지 않고 또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님, 주방에 이런 줄이 왜 있겠어. 이렇게 굵고 단단한 줄도 자를 수 있단 걸 보여주려고 갖다 놓은 거지. 봤죠? 동아줄은 물론이고, 급히 빤쓰 고무줄을 갈아야 하는데 가위가 없어, 그럴 때 이걸로 딱. 설마 빤스 고무줄 갈면서 누가 부엌칼을 쓰겠어요. 그냥 고무도 잘 잘린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나무라고 못 자를까. 이렇게 분리시켜서 나무에 턱 얹기만 해, 봤죠. 도끼처럼 팍팍 찍어대는데도 이빨 하나 안 나갔죠?”


  수박만큼 커다란 양배추가 가느다란 실처럼 썰려나갔고, 뱀처럼 똬리를 틀었던, 내 손가락만 한 두께의 동아줄이 자잘한 조각으로 뎅겅뎅겅 잘려나갔다. 그리고 칼로 얼마나 내리찍었는지 벽돌만 한 나무도 가운데가 움푹 패여 오래된 함지박 모양이 되었다.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에게서 꺄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쏟아졌고, 그는 무슨 대단한 칼잡이라도 된 양 그리 오만 짓을 해도 쌩쌩하기만 한 날을 자랑하기 위해 칼을 거꾸로 들어 보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가 칼이라며 들고 있는 것이 가위처럼 두 개가 엑스(X)자로 엉켜있어 날을 분리시키면 식칼과 과일칼, 두 개가 되는 희한한 칼이었다. 그래서 칼가위라고 하는구나. 저마다 저녁거리로 가득찬 시장바구니와 까만 비닐봉지가 무거운 것도 잊고서 그 희한한 칼을 보고는 탄성까지 질러대며 구경하느라 웅성이고 있었고, 그 속에는 칼가위의 매력에 푹 빠져 반쯤 정신을 놓은 나도 있었다.


  채 썰린 갖가지 채소, 조각난 줄, 쓸모없게 되어버린 나무토막이 산처럼 수북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말을 달렸던 것일까. 말을 모느라 힘줄이 툭툭 불거진 팔을 들어 모자를 고쳐 쓸 때 보니, 찬바람이 제법 부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 모습에 신임이 갔다. 조금이라도 하자있는 물건이라면 저리 열성적으로 팔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신들린 듯 주머니에서 막 돈을 꺼내려는 순간, 나를 잡아끄는 손이 있었다.


  “저거 다 사기꾼이야, 그만 보고 가요. 엄마.”


  사람들 속에서 같이 구경에 푹 빠진 내 손을 잡아끌며 아들이 작은 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런데 바쁜 와중에도 그가 아들의 말을 들었는지 우리를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변명처럼 말을 이어갔다.


  “나 사기꾼 아니에요. 칼만 몇 년을 팔아온 사람이야. 만약에 이 칼가위를 쓰다가 이빨이 하나라도 나가면 나 찾아와요. 내가 몇 배로 보상해줄 테니. 자, 다들 칼 보고 가요. 순수 국내 회사가 제작한 칼. 오늘만 단 돈 만 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살까말까 고민하던 몇몇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칼가위를 집어 들고, 행여 자신만 사지 못하게 될까봐 서둘러 만 원짜리 한 장씩을 내밀었다.


  “다른 장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칼장수는 어찌나 말이 번지르르한지, 죄다 사기꾼 같아요. 그리 좋으면 매일매일 나와서 팔아야죠. 그러면 사기꾼이라고 의심받진 않을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속상해 하지 말고 만약에 며칠 후에도 또 나와 있으면 그 때 사요.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더구나 오늘은 장볼 것도 많다면서 저 데리고 나온 거잖아요. 엄마 얼른 가요.”


  그 말에 가출했던 정신이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었고, 슈퍼에서 장을 보는 동안도 그 사이 다 팔린 건 아닐까 내내 걱정만 했다. 그리고 미련을 접지 못해 서둘러 장보기를 마친 뒤 다시 그 자리를 찾았을 때는 양배추며 나뭇조각이며, 커다란 비닐봉지에 쓰레기만 잔뜩 남긴 채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신기해서 정말 사고 싶었는데, 휑한 그 자리에서는 환청처럼 칼발굽소리만 더그덕더그덕 울리고 있었다. 


  며칠 후 다시 시장을 찾았을 때 그 칼잡이를 또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카우보이모자가 아닌 야구모자를 쓰고, 칼이 아닌 젓갈을 팔고 있었다. 


  “새우젓 멸치속젓 조개젓 명란젓 창난젓 어리굴젓 오징어젓 꼴뚜기젓 낙지젓, 액젓도 있어요! 어머니가 직접 담그고 아들이 파는 거예요. 진짜 국내산. 믿고 사가세요. 맛보고 가세요. 맛없으면 공짜!”


  “전에 칼가위 팔던 이 아녀?”


  “에이, 닮은 사람이겠죠. 저는 이날 입때껏 우리 어머니가 담근 젓갈만 팔아 왔는걸요?”


  아무리 봐도 똑같은 얼굴인데, 할머니의 물음에 그는 한사코 아니라며 정색을 했다.


  “그려? 똑같이 생긴 거 같은디. 암튼 내 그이만 만나면 돈 물어내라고 할 거여. 그 양반한티서 산 칼이 하루 만에 이빨이 나가드랑께. 두부 먹다가 이빨 빠진 기분이여. 근디 이거 진짜 국내산이여?”


  그가 이쑤시개로 낙지젓갈 한 점을 찍어 할머니에게 건네며 방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전 국내산 아니면 안 팔아요!”


  그럼 그렇지. 사기꾼 칼잡이 같으니.                 

작가의 이전글 가로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