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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Nov 04. 2020

정안휴게소

                           

   언제부턴가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한 시간 남짓 달리다보면 매번 그가 나타났다.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오랜만이라며, 긴 여행길에 좀 쉬어가라며, 맛난 거 먹고 가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술집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삐끼처럼 까딱까딱 손짓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건만 고속버스 기사아저씨는 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내 브레이크에 발을 얹고 만다. 두 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 딱 그 중간에서 길을 막고 달달한 군밤냄새를 흘려대며 매달리는데 이겨먹을 장사가 없는 것이다. 


  “만나봤냐? 반가워하든? 잘 지내고 있대?”


  “응. 어찌나 좋아하던지, 이놈의 인기는 도대체가 식지를 않아요.”


  큰언니는 언제나 그곳에만 가면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또 뻔뻔하게 대답한다. 그를 정말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설익은 아까시향이 길게 늘어진 가지마다 어설프게 매달려있는 오월끝자락. 꼭 이맘때 아버지 기일이 자리 잡고 있다. 딱히 아버지를 기린다기보다는 가끔 열리는 가족모임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 그저 엄마 얼굴, 언니오빠 얼굴 한 번 더 보겠다고 나서는 길. 한 시간이면 뚝딱인 KTX를 타기도 하고 또 남편을 대동하고서 자동차를 타고 가기도 하지만, 올해처럼 주중이라거나 남편이 바빠 갈 수 있는 사정이 되지 않을 때 큰언니와 나는 단 둘이 고속버스를 탄다. 오히려 남편 없이 가는 것이 속편하다. 남편 몰래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정안,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스물세 살 겨울 즈음이던가. 한참을 공들여 내 것으로 만들었던 남자친구와 별일도 아닌 일로 콩닥콩닥 싸우고는 몇 달을 헤어진 적이 있다. 막 헤어지고 울적한 나날을 보내던 그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작은오빠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안양까지 나를 찾아왔다.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오빠는 이 근처에 사는 친구라 불렀다며 딱딱하게 얼어있는 그를 소개했다


  “내 친구, 정안이야.”


  까무잡잡한 피부에 굵직굵직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로, 배우 이병헌을 꼭 닮은 얼굴을 한 그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지 밥을 먹는 내내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나와 제대로 눈도 맞추지 못하고서 우걱우걱 밥만 퍼먹었다. 얼마지 않아 오빠가 급한 일이 생겼다며 먼저 일어났고, 그는 늦은 밤길이라 위험하다며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핑계를 대고서 나를 따라왔다. 걷는 길에 근사한 찻집이 보이자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같이 들어가기를 권해왔고, 그곳에 들고서야 그를 처음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오빠는 우리오빠랑 진짜 친해요? 난 우리 오빠 웬만한 친구들은 다 아는데 왜 한 번도 못 봤지?”


  “전…, 봤어요. 그…, 형 결혼식 때.”


  “아, 우리 큰오빠 결혼식에 왔었구나. 그런데 무슨 존댓말을 하고 그래요. 동생인데.”


  “아직 좀 서먹해서….”


  그때만 해도 웬만한 찻집은 거의가 높은 칸막이에 흐릿한 조명을 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겨우 몇 마디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이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어머, 얘 나 좋아하나 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잘생긴 얼굴로 수줍어하던 모습이, 때 묻지 않은 말투가, 씨익 웃을 때 하얗게 빛나던 가지런한 치아가. 다른 무엇보다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있을 때 보인 부챗살처럼 길고도 짙은 속눈썹이 은근 눈길을 끌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그날부터 나의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다.


  누가 그를 수줍음 타는 사내라고 했는지, 내 눈은 삐꾸였던 모양이다. 그는 매일같이 찾아왔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눈병이라도 날 것처럼 매일같이 찾아와 밥을 사주고 꽃을 사주고 나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인형을 사서 안겨주었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을 때는 따끈한 붕어빵이나 하다못해 군밤 한 봉지라도 사들고서 겨우 얼굴만 보고는 돌아설 때도 있었다. 그렇게 월급을 나한테 몽땅 쏟아 부을 기세로 그는 돈과 시간과 마음을 나에게 많이도 헌납했다. 연애의 필수는 밀고 당기는 기술이건만 그것도 모르고 지고지순이었다.


  이상도 하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그게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복에 겨운 것도 모르고 방정을 떤 모양새지만, 항상 똑같은 데이트코스도 질려가고 주야장천 나만 바라보는 그가 조금은 미련하고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번 그리 생각하니 전 남자친구와 그가 자꾸만 비교되었다. 도시남자답게 뽀오얀 피부와 시골총각 같은 까무잡잡한 그의 피부빛깔. 깊고 그윽한 눈과 초롱초롱하긴 하지만 밍밍하기만 한 그의 눈. 노오란 금반지가 잘 어울리는 길쭉길쭉한 손가락과 손꾸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뭉뚝한 손. 다 핑계, 말 그대로 핑계였지만 한 번 박힌 미운털은 빠질 줄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무엇을 해도 그는 바보 같아 보였고, 어리석어 보였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나의 철없는 두 번째 연애, 홧김에 한 서방질이 끝나고 말았다. 


  “막내야, 정안이네가 그렇게 부자라며? 네가 정안이한테 시집갔으면 지금쯤 손가락으로 물 튕기면서 살고 있을 텐데, 아까워서 어쩌냐?”


  “언니, 어떻게 지금이라도 정안오빠 찾아가서 분발해볼까?”


  “아서라. 그리 뽈록 튀어나온 배를 보고 어떤 놈이 넘어오겠냐?”


  그리 말하며 언니가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쭈욱 눈으로 훑으며 혀를 찬다. 그 말에 배에 잔뜩 힘을 줘보지만 이십 년 넘게 뱃속에 자리 잡은 우리 둘째는 아무래도 나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오호, 통제라-. 


  정안이라는 이름은 나를 많이도 아껴주었던 사람이다. 푸근했던 사람이다. 미안한 마음만 남은 사람이다. 그는 아니겠지만 나는 이제와 가끔 여행길에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는 그가 반갑다. 어쩌면 내게 오래오래 기억될 이름. 여전히 그가 주는 군밤은 한겨울이 아니어도 맛있기만 하다. 언니가 아무리 놀려도 그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며 손사래를 쳐도 이따가 돌아갈 때 또 만나야지, 정안오빠. 아니아니, 정안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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