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김이 Oct 22. 2022

송전탑인지, 에펠탑인지..

파리에서 첫째 날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 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섯 곳 정도를 고르라고 한다면, 파리를 가장 먼저 말하고 나머지 네 도시는 더 고민해봐야겠다.


나는 파리라는 도시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를 뻔했었다.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계획할 때, 파리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강도에 가까운 소매치기, 냄새, 인종차별의 악명 때문이었다.

혼자서 그 악명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유럽 하면 파리인데 왜 파리를 안 가냐고 물었다.

알량한 자존심에 ‘무서워서’라고 대답은 못하고 ‘그냥’이라고 답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가볍게 말했다.


“왜? 그냥 가봐!”


그냥?

엄마 말을 곱씹어보니, 단순히 무서워서 파리를 안 가는 것에 분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 또 유럽을 갈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렇게 파리에 가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가짜 역무원에게 돈을 뜯길뻔하긴 했지만, 파리는 멋있었다.

노란 조명이 켜진 에펠탑, 약탈한 것들이 전시되었긴 하지만 거대한 박물관, 맛있는 크루아상과 바게트, 세느강을 끼고 걷는 것까지!

무섭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파리와 사랑에 빠졌고, 사랑에 빠진만큼 마음 한켠의 죄책감과 채무감이 느껴졌다.

이 좋은 곳을 나 혼자 보고 즐겨도 되는 걸까? 언젠가 꼭 엄마를 데리고 와야지!

흔히들 말하는 ‘K-장녀’의 표본이었던 나는 그런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바로 오늘, 언젠가 파리에 엄마를 데리고 오겠다는 K-장녀의 숙원이 이루어진다.







릴에는 계속해서 비가 오고 있었다.

물에 젖어 반질반질한 돌길 위로, 우리는 캐리어를 끌었다.

물 웅덩이를 피하고, 미스트 같은 보슬비를 온 얼굴로 맞으며 파리로 향한다.



우리는 파리까지 유럽 전역을 다니는 ‘플릭스 버스’를 타기로 했다.


플릭스 버스는 한국의 고속버스와 비슷하다.

다른 점은 대부분 버스터미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플릭스 버스 정류장은 혼잡한 길 한복판에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 혹은 간이 정거장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작은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는 또 얼마나 많던지.

유럽의 웬만한 곳은 다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정말 혼잡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몇 대의 버스를 보내고 나니, 우리가 탈 버스가 도착했다.


‘Paris (Bercy Seine)’


우리가 탈 버스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캐리어를 짐칸에 실은 것이다.

그러고는 가장 마음에 드는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줄을 섰다.

그런데 아직 짐을 싣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버스 기사 아저씨가 짐칸의 문을 닫았다.

그러더니 반대쪽 짐칸 문을 열었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반대편에 짐을 싣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기사 아저씨가 하는 말을 자세히 잘 들어보았다.

프랑스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베흐씨와 샤를드골이라는 단어가 귀에 딱 꽂혔다.

알겠다.

이 버스는 파리로 향하지만, 도착지는 두 곳이었던 것이다.

한 곳은 우리가 내릴 ‘베흐씨 역’이었고, 두 번째는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이었다.

그리고 도착지에 따라 짐칸을 나눈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우리는 ‘샤를드골 공항’행 짐칸에 캐리어를 실은 것이다.


우리의 짐을 옮겨야 했다.

기사 아저씨는 덩치가 큰 민머리의 프랑스인 아저씨였다.


.. 말을 걸 수 있을까? 프랑스인은 인종차별해서 말하기 싫은데..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파리에서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빈 손으로 가게에서 나와야 했던 나의 과거의 경험과, 인터넷에서 떠도는 누군가의 경험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뭐, 속으로 내가 어떤 생각과 문장을 가지고 있든 우리의 짐을 옮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사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하다.



잠시 고민했다.

영어로 말을 걸어야 하는가, 모르는 프랑스어로 말을 걸어야 하는가!

엄마와 동생은 고민하는 나를 냅따 기사 아저씨 쪽으로 떠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을 다 넣었을 즈음,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나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흐씨!’ 그리고 캐리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벗 러기지 인 샤를드골! 파흐동(미안하다)!’


단어들의 조합에 아저씨는 프랑스어로 뭐라 뭐라 말을 했고,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손짓발짓을 하며 연신 위! 위(yes)! 를 연발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고, 곧 샤를드골 공항행 짐칸을 열어주었다.

나는 메흐 씨(고맙다)~를 외치며 우리 짐을 꺼내 베흐씨행 짐칸으로 옮겼다.

아저씨는 고맙다는 내 말에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 프로블렘~”


걱정과 달리,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릴에서 파리까지는 버스로 세 시간 정도 걸린다.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향하는 기차에 만만치 않게 긴 시간이었지만, 버스에 사람이 많지 않아 한 사람당 두 자리씩 차지하고 갈 수 있어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동생은 누워있었고, 그 앞에 앉은 엄마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할 무렵 엄마가 건너편에 앉은 사람, 그러니까 내 앞에 앉은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에게 쳐다보지 말라며 눈치를 주었다.

엄마는 내 앞사람에게 시선을 떼었지만, 다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급기야 동생마저 일어나 그 사람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고서야 엄마와 동생에게 그 이유를 물을 수 있었다.

엄마는 내 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마스크를 내리고 화장을 해서 쳐다보았다고 했다.

나는 프랑스에서는 보편적으로 마스크를  철저하게 쓰지 않는 편이니, 쳐다보는 것은 실례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억울해하면서 말했다.


“근데 그 사람이 바지를 걷어올리고 다리에도 화장을 했단 말이야~”


그 말에 나도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지만 모범을 보이기 위해 그런 궁금증은 접어두고, 괜히 사람을 쳐다봤다가 이상한 인종차별을 당할 수 있으니 웬만해서는 쳐다보지 말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도착한 베흐씨 역은 지하주차장처럼 생긴 제법 규모가 있는 버스터미널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처럼 터미널과 지하철이 연결되어있지는 않았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공원을 가로질러야 했는데, 전날 파리에도 비가 왔었던 것인지 흙바닥이 아닌 진흙탕이 되었다.

질척 질척한 길 위로 캐리어를 끌으니, 역시 배낭이 최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파리에서 악명 높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지하철이다.

지하철이 파리에서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인 것은 사실이지만, 냄새, 소매치기, 사기꾼을 다 경험할 수 있는 종합똥세트이기도 하다(실제로 파리 지하철역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아무 곳에 배설을 하고 떠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하지만 베흐씨역으로 향하면서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냄새도, 소매치기도, 사기꾼도 아니었다.

바로 에스컬레이터였다.

선진국이라지만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친화적인 도시는 아닌 걸까? 파리의 지하철에서는 엘리베이터는 고사하고 에스컬레이터도 찾기 어렵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없다는 사실은, 캐리어를 끌고 있는 우리에게도 좋지 않다.

캐리어를 들고 내려갈 생각에 걱정을 가득 안고 베흐씨 역에 도착했다.

그러데 놀랍게도 내려가는 방향, 올라가는 방향 두 곳 모두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파리 지하철, 고맙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니 에스컬레이터에도 크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파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교통권이 있다.

그중,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파리에 머무르니 한 주간 사용 가능한 교통카드인 ‘나비고’를 구매하기로 했다.

아침에 있었던 플릭스 버스 아저씨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베흐씨역에 있는 고객센터에서 우렁차게도 말했다.


“트후아(세 개) 나비고 씨부쁠래(부탁해요)”


돌아온 답은 ‘노’였다.

나비고 카드가 없단다.

머쓱해하며 1회권만 세 장을 구매해 숙소로 향했다.






지하철을 한 번 환승해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지하철역은 고가철도 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있지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없었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오니 작은 고객센터를 발견했다.

저기에는 나비고 카드가 있을까?

나는 쭈뼛거리며 고객센터로 향했다.


“트후아 나비고 씨부쁠래”


단호한 얼굴의 고객센터 직원은 예, 아니오가 아닌, ‘일요일까지 파리에 머무냐’는 질문을 했다.

내가 토요일까지 머문다고 답하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계산은 하나씩 하면 된다고 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왜 처음부터 웃어주지 않는 것이지?

직원은 나비고 카드 세 개를 건네주면서, 카드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꼭 쓰라고 일러주었다.


나비고 카드 세 개를 품에 안고 따뜻한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숙소까지는 동생이 길을 찾기로 했고, 중간에 헤매기도 했지만 무사히 사진 속 대문을 찾았다.

대문을 열려면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내가 비밀번호를 찾아 불러주려는데, 동생이 대문의 철장 사이로 손을 쑤욱 넣어 안 쪽에 있는 문이 열리는 버튼을 눌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대문만 열었으면 된 것이다.



파리의 첫 번째 숙소는 우리가 단독으로 사용하는 원룸형 숙소였다.

문제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라는 것이다.

계단을 오를 각오는 이미 했다. 다만 그 계단이 나선형 나무 계단일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엄마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힘들다고 했다.


캐리어가 작은 엄마와 동생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고, 나는 뒤따라갔다.

그런데 위에서 동생의 ‘꽥!’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층 수를 생각 안 하고 올라가다 보니 6층까지 올라갔단다. 힘이 남아 도니?

동생이 열쇠로 문을 여는 사이, 엄마가 캐리어를 올리는 것을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난 이제 지쳤어요.



엄마와 진흙이 묻은 캐리어 바닥을 닦는 동안, 동생이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다가 창밖의 에펠탑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숙소에서 보이는 에펠탑



정말 뿌듯했다.


이 숙소를 찾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혼자 여행했다면 엄두도 못했을 그런 숙소였다.

동생은 열심히 사진을 찍으랴, 영상을 찍으랴 바빴다.

그런데 엄마는 에펠탑을 보고도 본체만체했다.


왜일까? 포르투의 동루이스다리처럼 별 감흥이 없는 걸까?

나는 엄마에게 저게 뭔지 아냐고 물었고, 엄마는 대답했다.


“파리에도 송전탑이 있네..”


내 입에서 단전에서 끌어올린 괴성이 튀어나왔다.


“저게 에펠탑이야아아악!!!”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엄마는 에펠탑이 생각보다 볼품없다고 했다.


아.. 난 정말 지쳤어요.



동생은 시간이 아깝다며 빨리 나가자고 성화였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으니, 바로 장보기였다. 매일매일이 장보기의 굴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버려서 장을 보러 갈 힘이 없다고 했고, 엄마와 동생은 본인들이 장을 보고 오겠다고 했다.


엄마와 동생이 나간 사이, 나는 세느강을 지나는 유람선인 ‘바토무슈’ 티켓을 예약했다.

바토무슈를 해가 질 때 타면 세느강의 다리들과 에펠탑에 조명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해가 지는 시간을 체크하며 오늘 일정의 시간을 나눴다.


한편 엄마와 동생은 두 손 한가득 짐을 들고 돌아왔고, 간단하게 밥을 먹고 에펠탑에 가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한 번쯤 예상했던 동생과의 트러블이 발생했다.

동생은 내 검정 코트를 입겠다고 했다.

내 검정 코트로 말하자면, 사이즈를 한치수 크게 사는 바람에 170에 달하는 나에게도 발목까지 오는 긴 코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코트였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동생이 그 코트를 입은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만은 입지 않길 바랐다. 파리 바닥이 얼마나 더러운데!

동생은 분명 코트를 망가뜨릴 것이다!

내가 제발 입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동생은 이 날, 이 시간에 그 코트를 입기로 예전부터 계획했기 때문에 입어야겠다고 했다.

평소에 계획은 하나도 안 세우면서 이런 거에만 열심히라고 투덜거리며 코트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내 코트여…



엄마의 표현에 따르자면, 늙은 엄마를 부려먹는 동생






아까는 볼품없다고 했지만, 막상 에펠탑 앞에 오니 엄마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엄마가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것은 첫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이후로 처음이었다. 엄마의 마음에 들은 것 같아 다행이다.


사람들이 피크닉을 하곤 했던 에펠탑 뒤의 공원은 2024년 파리 올림픽 준비를 위해 공사 중이었다.

에펠탑을 제대로 보기 위해 에펠탑 앞으로 향하는데, 사람이 많았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많은 도시들을 지나왔지만, 파리는 마치 코로나 이전인 것처럼 사람이 정말 많았다.



다리 위의 많은 사람들



동생이 사진을 찍겠다고 높은 곳에 올라가다 코트를 구깃구깃 밟는 것을 보고, 내가 소리를 꽥 지른 것 말고는 순탄했다.

에펠탑을 봤으니 우리는 바토무슈 선착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도 사람이 꽉 차 있었는데, 엄마는 코로나에 걸릴 것 같다며 숨을 꼭 참았다.

이러다 우리 엄마 기절하겠다.



우리는 바토무슈 2층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동생은 그 순간에도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아깝다며 유람선 곳곳을 누볐다.


바토무슈는 1시간 정도 파리 시내를 둘러보는 코스로 운영된다.

문제는 출발한 지 30분이 지났는데도 파리 시내의 조명이 켜지지 않는 것이었다.

옆에 앉은 동생은 ‘언니 때문에 조명이 들어오는 것도 못 보게 생겼다’며 투덜거렸다. 분명 슬슬 조명이 들어와야 하는데? 나도 덩달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동생이 해가 지고 나서 바토무슈를 또 타야 하는 것 아니냐고 궁시렁거릴 즈음, 드디어 세느강의 다리들과 에펠탑에 조명이 들어왔다.




조명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엄마와 동생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엄마도 동생 옆에서 동생을 따라 셀카를 찍고 있었다.

뭔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세느강 위의 유람선에서 노란 에펠탑을 보고 있다니… 지금 우리는 파리에 있다.



바토무슈에서 내리면서 의기양양해진 나는, 동생에게 바토무슈를 한번 더 타고 싶냐고 물었다.

동생은 추워서 이제 싫다고 했다.

우리는 개선문을 보고, 샹들리제 거리에 있는 라뒤레에서 마카롱까지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을 때다.


엄마는 낮에 장을 보면서 먹고 싶었던 것을 샀다며, 그것을 꼭 먹어야 한다고 했다.

무언가 하고 봤는데, 바로 생선 대구였다.


엄마는 고기보다 회와 생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대구 요리를 많이 팔았기에 먹으려고 결심했다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염장한 대구요리는 나에게도 짰기 때문에 메뉴를 고를 때 가장 먼저 넘기곤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내색은 안 했어도 그게 계속 먹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고기와 대구를 굽고 와인도 마셨다.

엄마와 동생은 창 밖으로 보이는 에펠탑을 보며 파리가 좋다고 했다.


에펠탑을 바라보며 와인을 제법 마신 엄마는 돌아가신 서울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퍼했다.

나도 조금 슬펐다.



숙소에서 바라본 밤의 에펠탑






내가 처음 파리에 왔을 때 엄마를 떠올렸던 것처럼, 오늘 엄마도 에펠탑을 보며 서울 할머니를 떠올렸을까?

엄마는 서울 할머니에게 못해준 것들이 생각나서 슬프다고 했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우리는 파리에 도착했다.

사실 이때 나는 조금 지쳐있었다.

하지만 다시 힘을 내야 한다.

언젠가 지쳐있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못해준 것들이 많이 생각날 것 같으니 말이다.

내가 좋은 것을 보면 엄마가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내가 엄마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빨리 힘을 내서 엄마에게 파리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다.

누구나 언젠가 필연적으로 하고 마는 그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전 18화 때로는 목표가 먹는 것뿐일 때도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