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에서 첫째 날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유럽 대륙을 여행하다 보면, 거쳐가는 도시가 생기기 마련이다.
첫 유럽여행을 했을 때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독일의 ‘본’으로 가기 위해 지났던 독일의 ‘쾰른’이 그랬고, 독일 교환학생을 하면서는 여행을 갈 때마다 지나게 되었던 ‘스투트가르트’가 그랬다.
각자만의 특색이 있는 도시들이겠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우리가 거쳐가기로 결정한 프랑스의 도시 ‘릴’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보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이 더 가까운 도시다.
릴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바로 릴행 비행기표 값이 싸서. 그래서 릴을 파리로 가는 관문으로 삼아, 하루만 머무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릴에서 해야 할 일도 단 한 가지다.
바로 먹는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비행기 이동이다.
비행기 이동은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번거롭다는 단점도 있다.
지금까지 비행기를 탈 때마다 캐리어를 찾느라, 시내에 가는 방법을 찾느라, 여러 방면으로 고생을 많이 해서 비행기 이동이라면 치가 떨린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끝이다!
오늘은 커피포트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룸서비스도 안 되었던, 우리가 머무른 작은 호텔의 진가가 발휘되는 날이다.
호텔 바로 뒤의 광장에는 새벽 공항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있다.
릴에 가는 비행기는 아침 6시 50분 출발이라 적어도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야 했다.
만약 동루이스 다리 근처로 숙소를 잡았더라면 우버가 안 잡혀 불안해하다가, 캐리어를 끌고 극악의 언덕을 올라와야 했을지도 모른다.
뿌듯해하면서 공항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도로 공사로 공항버스 정류장 위치가 바뀐 것이다.
포르투의 크리스마스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장에는 버스정류장이 5곳 정도가 있었다.
엄마와 동생에게 일단 버스 정류장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한 후, 공항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맸다.
새벽에 사람은 아무도 없지, 추적추적 비는 내리지, 버스 시간은 15분도 안 남았지, 포르투는 끝까지 나를 눈물 나게 만든다.
뺨에 흐르고 있는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가늠이 안되던 즈음, 엄마와 동생이 멀리서 내 쪽으로 캐리어를 끌고 왔다.
비가 오니 거기서 기다리라니까 왜 왔냐고 물었다.
엄마는 멀리 멈춰있는 버스를 가리키며, 저 버스 아저씨가 공항버스 정류장을 알려줬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를 따라 공항버스 정류장에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아저씨와 어떻게 대화를 했냐고 묻자, 아저씨가 먼저 에어포트 어쩌고 하면서 위치를 알려줬다고 한다.
친절한 아저씨였다.
그리고 역시 비행기 이동은 싫다.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졸다 보니 릴 공항에 도착했다.
릴 공항은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가 두 개뿐일 정도로 작은 공항이었다.
확실히 북쪽으로 올라와서인지 뚝 떨어진 기온에, 우리는 캐리어에서 목도리를 꺼내느라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공항 밖으로 나갔다.
릴에는 지하철도, 시내버스도 있지만 우리가 시내에 가기 위해 선택한 교통편은 바로 우버였다.
나는 슬슬 우버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어플로 도착지를 정해두기 때문에 기사에게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요금 바가지를 쓰지 않아도 되는 우버의 매력에 눈을 뜬 것이다.
게다가 우버 탑승구역이 정해져 있는 리스본 공항과 달리, 릴 공항은 일단 우버를 부르고 나면 매칭된 기사가 메신저를 통해 만날 장소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쉽게 우버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우버를 타고 릴 시내에 도착했다.
릴의 숙소는 작은 비즈니스호텔이었다.
그런데 건물 입구에 노숙인이 검은 개와 함께 누워있었다.
엄마와 동생은 처음 보는 유럽 노숙인에 움찔했고, 노숙인들을 오랜만에 보는 나도 덩달아 움찔했다.
하지만 이럴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
나는 척척 걸어가 건물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노숙인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엄마와 동생도 나를 따라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방은 제법 넓었는데, 그래서 라디에이터를 최대로 돌려도 추웠다.
비가 와도 배는 고프기에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프랑스의 네 번째 도시라 불리는 릴은 프랑스의 ‘부르고뉴 공국’, 프랑스와 벨기에에 걸쳐있던 ‘플랑드르’, 스페인 등 주인이 여러 번 바뀐 도시다.
특히 벨기에의 국경에 인근해 있는 도시로, 벨기에처럼 홍합요리, 와플, 감자튀김이 맛있다고 한다.
벨기에는 내가 안 가본 나라 중 하나인데, 모처럼 릴에 머무르니 벨기에에서 못 먹어본 홍합요리, 와플, 감자튀김을 먹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은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날이자,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미리 알아본 홍합요리 식당은 물론, 추운 날씨에 몸을 좀 녹여볼까 찾아본 쌀국수집도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구글지도에 따르면, 현재 운영하고 있는 소고기 타르타르 가게를 발견했다.
소고기 타르타르는 쉽게 말하면 프랑스식 육회인데, 엄마와 동생이 안 먹어본 음식이었다.
그런 만큼 소고기 타르타르도 꽤나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가게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또 구글지도에 속다니, 이 정도면 내가 바보다.
중앙광장에 위치한 몇몇 식당들이 운영 중이었지만 대부분 만석이었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당시, 프랑스는 코로나 오미크론과 델타 변이가 동시에 유행하고 있었으며, 확진자는 연일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숫자였다.
코로나에 확진되면 음성이 나올 때까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코로나에 확진되는 것은 나에게도 부담이 컸다.
거기에 엄마의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도 아주 컸다.
원래 몸이 좋지 않은 체질인 데다가, 아이 셋을 제왕절개로 낳았고, 갱년기가 온 엄마가 코로나까지 걸린다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그래서 광장과 조금 떨어진 식당들을 찾아보았던 것인데 다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전날 먹지 못했던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
일단 간단하게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자!
릴은 프랑스 북부 공업의 중심지로도 유명하지만, 프랑스의 전(前)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샤를 드골 공항의 그 샤를 드골이다)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릴에는 샤를 드골이 사랑했다는 디저트 가게 ‘Meert’가 있다.
Meert에서 판매하는 밀푀유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밀푀유를 구매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요일이어서인지, 일찍이 정리를 하고 있는 Meert의 밀푀유는 품절이었다.
그래서 남은 디저트들 중에서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 두 개를 포장해 숙소로 향했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숙소 근처에 들어오니 쏟아지기 시작했다.
작은 3단 우산 하나뿐인 우리는 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숙소에 머물러야겠다.
숙소의 공용 주방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엄마가 프랑스의 간편식은 어떨지 궁금하다고 해서 구매한 프랑스식 갈비찜 ‘부르기뇽’은 괜찮은 맛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컵라면이 최고였다.
우리 아빠로 말하자면 국물을 찾는 입맛의 소유자여서,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먹곤 했다.
반면, 아침에도 밤고구마를 먹을 수 있는 입맛을 가진 나는 그런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아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뻑뻑하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왜 국물이 먹고 싶은 것인지 말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Meert에서 구매해온 디저트를 먹어보았다.
세상에!
우리는 자칭 빵의 도시에서 10년을 넘게 살았고, 그래서 빵에 대한 기준은 높다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Meert의 디저트는 그런 우리를 녹여버렸다.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 있지? 캐러멜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정말 맛있었다.
이 입을 즐겁게 하는 식감은 무엇이고, 은은한 견과류 맛은 무엇이냐. 느끼하지 않은 이 크림은 도대체가…! 샤를 드골이 사랑한 이유가 다 있던 것이다.
Meert의 디저트, 올해 최고의 맛으로 인정합니다.
릴에서 해야 할 일 중 3분의 2는 Meert의 디저트를 먹음으로써 끝냈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졌고, 우리는 숙소에서 재정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파리에서 있을 투어들의 일정을 조정하느라 바빴다.
새벽부터 움직인 것이 피곤했는지 엄마와 동생은 잠에 들었다.
두 시간 정도 쉬었을까?
비가 그쳤고, 북쪽이어서 그런지 벌써 해도 졌다.
엄마와 동생에게 저녁의 릴을 구경하러 나가자고 제안했다.
동생은 당연히 오케이 했지만, 엄마는 싫다고 했다.
이런 날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음침한 영화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의견을 존중해, 동생과 둘이서 밖으로 나갔다.
물기 있는 돌바닥에 노란 조명이 비쳐서 그런지, 저녁의 릴은 반짝반짝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었다.
동생은 조명만 보면 달려드는 나방처럼, 열심히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물 웅덩이를 밟을 뻔하기도 했다.
간단하게 산책을 하면서, 오늘 홍합요리를 못 먹은 대신 감자튀김과 와플은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에 가지 않고도 벨기에식 감자튀김과 와플을 먹을 수 있는 도시, 릴에 온만큼 이 두 가지는 놓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감자튀김들과 달리, 벨기에는 두꺼운 감자튀김을 마요네즈에 찍어먹는다.
그리고 벨기에식 와플은 반죽에 달걀흰자를 넣고 석쇠에 구워 위에 과일이나 크림 등을 얹어 먹는다.
직원과 약간의 의사소통의 오류는 있었지만 무사히 감자튀김과 와플을 샀다.
우리는 당당하게 방에 들어갔다. 마치 사냥에 성공한 가장처럼!
“우리가 뭘 사 왔게?”
감자튀김을 좋아하는 엄마는 당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동생은 자기는 이미 벨기에식 감자튀김을 먹어봤다 했다.
아마 한국의 폼프리츠의 감자튀김을 말하는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아무리 ‘이 감자튀김은 마요네즈에 찍어먹는 것’이라고 얘기해도 케첩이 좋다며 맥도널드에서 가져왔던 케첩을 뜯었다.
그러고는 역시 감자튀김은 케첩이란다.
취향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감자튀김도, 와플도 맛있었다. 릴에서 해야 할 목록 80% 정도는 이룬 셈이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릴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우리는 아주 만족한다.
원래 목표였던 먹는 것들을 대부분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쁘다.
왜냐하면 내일은 드디어 마지막 도시, 파리에 가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던 도시이동이 곧 끝나서 기쁘고, 동생은 꿈에 그리던 파리에 가는 것이라 기쁘고,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기쁘다.
그러니까, 기다려라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