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by 김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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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감독 : 헬비오 소토

장르 : 드라마

2016.11.01.화




남미의 도시 산티아고에 대한 정보가 없던 나는 산티아고라고 하면

따뜻한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그런 도시를 떠올렸었다.

그러나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속의 산티아고는 전혀 다른 도시였다.

영화 속의 산티아고는 격동적인 역사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영화 초반, 파시즘와 사회주의가 나누어진 것에 대해

기존에 파시즘이 사회주의에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었기에

두 진영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사회주의를 접해보지도 않았고,

맹목적으로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왔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 파시즘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8B%9C%EC%A6%98

위키피디아 사회주의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D%9A%8C%EC%A3%BC%EC%9D%98






영화는 굉장히 건조하게 진행되고 장면 전화는 꽤나 투박하다.

또한 특정한 주인공도 없다.

이러한 형식은 영화를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만든다.

영화 속 독재자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화창한 날에

라디오의 ‘산티아고에는 비가 내립니다’라는 암호와 시작된다.

이 암호는 마치 한국의 화려한 휴가가 떠올리기도 한다.

쿠데타의 암호를 전하는 언론은 자본에 넘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칠레는 투표라는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사회주의가 된 국가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아이들도 없어서 못 마시는 ‘우유’가

미용과 디저트에 사용되는 빈부격차를 강조하고

칠레의 부가 국민들에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구리광산을 국유화하려고 한다.

현재에도 많은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국유화도

사회주의에서 내놓은 정책인 것을 감안하면

정치에서 이념을 절대적으로 가를 수는 없는 것 같다.


자유주의 진영인 미국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는

투표를 무시하고 돈으로 매수해 파업을 주도하며

사회주의의 정책들이 나라를 분열시킨다고 몰아간다.


핀업걸 사진이 붙어있는 회의실에서

탱크로 국민들을 짓밟고 부자들을 보호해주는 파시즘 진영이

나라를 분열시킨다는 것으로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부분은

가장 역설적이고 인상 깊은 부분이다.



시민들은 미국의 칠레 내정 간섭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몇몇은 파시즘의 사주를 받아 진행되는 파업이

빨갱이 때문이며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기자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며

파시즘의 선동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드러난다.






쿠데타가 시작되고 학생들, 노동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밖에서 대항한다.

군인들 몇몇도 후에 탱크가 몰려올 것임을 알면서도

시위 진영에 뛰어들기도 한다.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면서도 저항하는 그들과

그들을 보내주고 지지하는 부인, 부모님들 역시 진정한 사랑에서 시작된 행동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위대와 학생 등이 죽어나갈 때, 부르주아들은 군인들의 보호를 받고

샴페인을 마시며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빨갱이들은 죽어야 한다면서 낄낄거린다.


이념을 떠나서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순간을

희롱하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은 시민들의 저항을 정당하게 하고,

정말 보호받아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장면이다.



그동안 나는 자유주의라면 무조건 ‘선’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은 영화를 통해 처참하게도 깨졌다.

정치에 무조건적인 ‘선’이라는 것은 없다.

결국 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할 뿐이다.



영화 속의 희생들은 모두 욕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부가 가난한 이에게 조금이라도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부르주아들과

남미에 사회주의가 퍼질까 두려워

그것을 막기 위해 군사 지원을 한 미국의 욕심이 이런 참혹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의 눈치를 보며 이를 방관하고 외면한 언론 역시 이에 동조했다.


마지막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며 아옌데 대통령을 비롯한 모두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나오는 탱고는 꺾이지 않는 그들의 이념과 자유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느껴졌다.

또한 상반되는 음악과 상황은

앞으로의 독재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암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피노체트 정권은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표현하며 깎아 내리며

아옌데를 두 번 죽이려 하고 총을 지닌 채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무력으로 언론의 입을 막으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론인들이 증인이 되기 위해 역사를 기억하려 한다.


마지막 비극적인 내레이션과 희망찬 노래는

결국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잡은 아옌데는 존경받으며,

폭력을 이용한 피노체트는 살인자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이

그들의 무력이 결국 실패했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비록 영화 속에서 체육관 속의 대학생들은

군인들의 무력에 노래조차 크게 부르지 못했지만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식에서는 모두가 목청것 외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결국 피노체트를 끌어내린다.


민중은 어쩌면 가장 작고 힘없지만

가장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비록 피노체트의 독재가 무너지기 전에 제작되었지만,

감독은 결국 폭력에 의한 정당하지 않은 정권은 패배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퇴진을 외치며 전국 각지에 모인 것처럼 말이다.


70년대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시 정권과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정권과 비슷한 점이 많아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난다.

하지만 역사에서 늘 그래왔듯 결국 민중이 승리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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