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기 2단계-예약하기
인간은 불확실한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 이는 진화론적으로 각인된 생존 본능일 수도 있으며, 욕구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발생했을 때 혹은 안정된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
이때의 나는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라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항공권을 끊은 지 하루 만에 새로운 코로나 변이라는 불확실함은 불안함을 계속해서 키웠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 자부했던 여행에 대한 설렘은 사라졌고, 어떻게 하면 이 여행을 멈출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항공권을 무료로 취소하느냐 말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완벽했던 E항공사에 무료 취소가 불가능했다. 오미크론이라는 불확실함으로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던 많은 항공사들은 항공권 무료 취소가 가능했지만, E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은, 다른 중동항공사들도 E항공사처럼 항공권을 구매하며 코로나19 여행자 의료보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항공권 무료 취소도 가능했다.
섣부르게 항공사를 선택한 것이 나의 첫 번째 실수였다.
잔꾀를 쥐어짜던 내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항공사에서 구매한 지 24시간이 안된 항공권은 무료 취소가 가능하다. 아직 항공권을 구매한 지 20시간뿐이 지나지 않았다. 4시간이 남은 것이다.
쾌재를 부르며 항공권 취소를 시도했지만, 나의 두 번째 실수가 발목을 잡았다. 싼값을 쫓아 항공사에서 항공권을 직접 구매한 것이 아니라 여행 대행사에서 구매한 것이다.
여행 대행사 상담원은 일반적인 취소 수수료와 무료 변경 기간에 대해 설명했다. 구매한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경우 무료 취소가 가능하지 않냐고 문의하자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다.
당연히 가능하겠지라는 자신감과 함께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섣부른 선택이었을지도 몰라. 오미크론이 뭔지 파악하고 나서, 내년 봄쯤에 가면 되는 거야.
그러나 답변은 오지 않았고, 다시 불안함 속을 헤맸다. 24시간이 되기 한 시간 앞두고 드디어 온 답변은 ’ 안된다 ‘였다. 여행 대행사에서 판매하는 항공권은 일반적인 항공권이 아니기 때문에 규정 적용도 달라 24시간 이내 무료 취소가 안 된다고 한다.
말이 안 된다는 불만을 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랑이를 하는 동안 24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가야 했다.
그래도 아직 선택지는 있었다. 여행을 미루느냐, 강행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출국일까지는 10일이 남았고, 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가, 미뤄, 가, 미뤄, 가, 미뤄? 이럴 때는 가야 할 것 같고, 저럴 때는 안전하게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어떤 때는 '그래, 미루는 게 맞지' 하다가도 '지금 못 가면 영원히 못 갈 것 같다'라고 했다. 한편 동생은 '그냥 가자'주의였는데, 대신 미룰 거면 자기는 자격증 시험 일정이 있으니 내년 5월로 미루자고 한다. 그때까지 내가 미취업 상태이길 바라는 고약한 심보라고 생각했다.
초조하고 불안해 신경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교통비와 숙박비는 오를 것이며 선택권도 줄어든다는 것 말이다. 3일간의 격렬한 고민 끝에, 그리고 불안해하며 고통받은 것이 억울해서, ‘지금 못 가면 영원히 못 갈 것 같다’는 엄마의 핑계를 대며 예정대로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실수의 대가는 여행이었다.
그렇게 출국일까지 7일, 그리고 내 퇴사 날까지 4일. 그 안에 숙소 및 교통편 예약해야 한다.
예약에 앞서 이번 여행에 참여하는 파티원들의 MBTI를 공개한다.
나 : intj (내향적 / 직관형 / 사고형 / 판단형) - 용의주도한 전략가
엄마 : isfp (내향적 / 감각형 / 감정형 / 인식형) - 호기심 많은 예술가
동생 : entp (외형적 / 직관형 / 사고형 / 인식형) -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
mbti를 통해 각자의 성격을 백 퍼센트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완연한 봄에는 봄꽃을 즐겨야 하며, 무더운 여름에는 그늘로 향해야 하며, 서늘한 가을에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러, 하얀 겨울에는 눈을 맞아야 하는 사람이다. 엄마 말에 따르면 놀새고, 친구들 말에 따르면 역마살이 꼈다. 노는 것이, 아니 노는 것을 계획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한 때 계획 짜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행 계획을 세워주는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요즘은 인공지능이 다 해줄 테니,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긴 사례일지도 모른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여행 일주일을 남기고, 그것도 퇴사준비를 하면서 급박하게 여행계획을 세우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기에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여행에 관련된 예약을 하랴, 퇴사 선물을 고르고, 자료 정리하고, 감사편지를 쓰랴, 일주일 동안 새벽 3시 이전에 자본적이 없다. 시험기간에도 그렇게 열심히 해본 적 없는데 말이다. 나는 어쩌면 노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함을 회피하기 위해 계획에 몰두해 왔던 것 같다. 이런 나를 엄마와 동생은 예민하다고 했다. 맞다, 나는 예민했고, mbti 관점에서는 통제형 인간이었다.
불확실성을 회피하려고 예민해진 나를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일단 엄마는 아니다. 엄마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유럽 여행이 처음인 것은 둘째 치고, 사실 엄마는 계획을 세우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은 스타일이다. 엄마가 궁금한 것은 그저 경비뿐이다.
다행히 파티원 한 명이 남아있었는데, 바로 동생이었다. 이때 나는 동생에게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1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나는 1이고 엄마는 0일 것이다. 그렇다면 동생은 0.8 정도는 해줄 것이라 기대했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엄마와 동생은 본가에 있었다. 동생과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우기로 약속하고 마지막 남은 휴가를 썼다. 그러나 전화를 걸자마자 동생은 약속이 있다며 떠나버리며, 0만큼의 역량을 보여줬다. 사람은 함부로 기대하면 안 된다. 동생이 가지고 있는 역량도 0이었던 것이다. 총합 1 역량의 불안하고도 예민한 여행의 시작이다.
홀로 계획한 일정은 이러했다.
도시 간의 이동은 최대한 육로를 이용하고 싶었다. 긴 이동에는 비행기가 불가피하니, 단 한 번만 이용하려고 했다. 처음 계획은 그러했다.
유럽 내에서 먼 거리에 있는 도시로 이동할 때, LCC항공사(저가항공사)는 빼놓을 수 없는 선택지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불안 요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먼저 공항과 시내가 너무 멀다는 점, 체크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항상 탈 때마다 진행되는 기준이 빡빡한 수화물 검사도 두려웠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었다.
반면 육로 이동은 예측이 가능해 편안했다. 기차역들은 대부분 시내에 있기도 하고, 수화물 검사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소소한 로망도 있었다. 나는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때문에 리스본에 가는 야간열차는 정말 타보고 싶었다.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출발지도 스위스는 아니었는 데다가 영화와 달리 침대칸을 예약할 예정이었지만 이름값 때문이라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낭만을 실현하지 못했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출국까지 일주일. 그 뜻은 한국처럼 정찰제가 아닌 유럽 교통편의 가격이 오를 만큼 올랐다는 뜻이다. 이러다가 한국에서 유럽 왕복하는 비행기만큼 예산이 추가되게 생겼다. 역시 방법은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인 LCC항공사로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오로지 항공사의 일정과 항공권에만 집중하다 보니, 방문할 수 있는 도시도 제한이 생겼다. 그렇게, 항공권이 조금 많이 값이 나가던 도시 ‘세비야’는 우리의 일정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기대하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운행을 중단한 상태였다. 또다시 어쩔 수 없이 리스본행 비행기를 선택한다.
포르투갈 내에서 이동하는 기차 편은 다행히 구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교통편은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에서 프랑스 파리로의 이동이었다. 항공권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그렇다면 일정을 우회해서 파리 근교로 가보자. 프랑스를 넘어 벨기에, 독일 도시까지 물색한 결과, 가장 파격적인 가격에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는 ‘릴’이라고 불리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 쪽에 위치한 도시로 향하기로 했다. 이 도시를 발견했을 때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유레카를 외쳤다. 항공권 가격을 90퍼센트 줄이다니, 이런 구원자는 또 없을 것이다.
결국 여행하면서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단 한 번 이용하게 되었고, 버스 한 번, 나머지는 모두 비행기로 이동하게 되었다.
어쩌면 육로 이동도 실제로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생각한 계획에 예상치도 못한 변동이 생기니, 불안함은 가중되었다. 내게 여유가 있었다면 웃으면서 받아들였을 텐데, 나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한껏 예민해지기만 했다.
불확실한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인간들은 애석하게도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간다. 나를 괴롭게 하는 불안이 싫어 나노단위로 계획을 짜며 대비하려 해도, 불확실한 것들은 계속해서 튀어나오니, 피할 수 없는 불안을 견뎌내거나 혹은 여유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 멈출 수 없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가야 한다. 불안함으로 가득 찬, 내가 선택한 이 여행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