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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Dec 19. 2018

아들을 위해 다짐하는 것들

너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한국을 떠나있던 14년동안 내 머릿속에 그리워했던 부모님, 내 기억에 존재했던 그 분들은  나에게 있어 누구보다 옳았고, 자랑스러웠고 나에게는 롤모델이었으며, 다른 어느 부모님들과 견주어봐도 그만한 희생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부모는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머리가 크고나서, 그리고 집을 떠나 사회에서 부딪혀가며 만들어진 나의 시각으로 마주한 지금의 부모는 너무 다르게 보이는 혼란이 닥쳐왔다. 예전 그대로 같은 성향이지만 너무 달라진 부모님. 
어떻게 된걸까.


섬세한 성격으로 다른 이의 뜻을 관철할 줄 알았던 아빠의 관찰력은 지금와서보니 상대방이 직접 표현하지 않은 부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모습으로 보였고, 엄마의 담대한 추진력과 시원시원한 성격은 그 다른 이면에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부분과 자기 고집을 밀고 나가는 모습으로, 언제나 강한 정신력으로 남들에겐 무리한 일들도 손쉽게 해내던 아빠의 강인한 모습은 그만큼 남의 약한 부분을 살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을 아끼지않고 나를 위해 본인들의 모든 걸 걸고 나의 안전을 추구한 든든했던 모습은 커서는 내게 자립심이 생기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 놓은 모습으로 보였다.

사실 이 모든게 소름끼치리만큼 팀원들이 내게 쏟아내던 불만, 또는 남편이 내게 했던 불평과 같았다. 물론 다른 이들이 칭찬해 줬던 부분과 아이러니하게도 동일하다.


나는 마치 한 남자를 만나 좋아했던 성격의 한 부분이 권태기를 맞아 지금은 단점으로만 느껴지는 그러한 상황을 내 부모와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 부모가 바뀐것일까.

아니. 부모님은 똑같았다. 내가 달라졌다.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부모님은 너무 같아서 달라진 내가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행성 주위를 맴돌며 다른 면들을 보게되는 인공위성처럼 내 위치가 달라진 것 뿐이었다.


그 분들은 그저 전과같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저 어렸을때 자녀에게 대해야하는 태도와 성인이 된 자녀에게 취해야하는 행동이 달라지지 못한 부분에서 내게 오는 혼란이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때 집을 떠났던 그 모습이 정서적으로 마지막 기억일테고, 어쩌면 나 또한 부모님을 대할 때에는 고등학교 1학년 청소년기의 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자랑스러웠던 그 모습들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필요로 했던 부모로써의 성향들이다. 어린 아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는 법을 가르켜주고, 그 뜻을 생각할 수 있게 알려주고. 약한 새싹에게 담대히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법도 가르쳐주고 남에게 너무 상처받지 않도록  강해지는 법을 말로 가르쳐왔다면 힘이 어느 정도 자란 나무에게는, 타인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방법, 남이 다치지 않게 어울어져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실천하는 방법으로 가르치며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그 관계속에서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아마 집에 있을 때는 부모밑에서 보고 자라고 그것이 옳다고 커 왔고, 밖에서의 다른 이념, 사상 또는 어떠한 개념과 충돌이 있을때 집에서 다시 부모와 대화로 그런 개념들을 재정립해오면서 우리의 생각과 관념이 어느정도 맟춰져왔다면,  떨어져있던 14년동안 나는 부모와의 생각을 나누지 못한 채 나의 생각들을 독립적으로 정립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잔인하리만치 객관적으로 부모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새로이 보게되는 모습에 죄송한 마음과 실망감이 상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꼭 그 이유만으로 마찰이 있어야 했을까. 생각이 다르다라는 이유만으로 불통이라는 단어가 오가고 답답한 순간들이 생겨야했을까.


대화방식의 문제

어쩌면 이 문제는 수평적인 대화문화보다는 유교사상을 아직 가지고 있는 부모세대의 수직적인 대화방법에 반해 수평적인 대화를 원하는 자녀들과의 미스매치 일 것이다.


가치관의 문제 => 세대차이

살아온 날들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살아온 환경, 자라온 시대 그 모든 것이 같을 수 없기에. 게다가 너무 빨라진 변화를 겪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서 어쩌면 점차 고정되어 가고있는 부모세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불통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사고방식의 문제

유연하지 못한 사고방식으로 상대방을 먼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사실 쌍방의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누가 누구를 먼저 이해하고 맟춰준다는 방법보다는 "왜"라는 문제제기가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어른을 무조건 존경해야 하는지, 왜 수평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왜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세계관도 존중되는게 마땅한지. 그 문제제기 속에서 옳고 그름이 판단되면 내가 지켜오던 관습이던, 추구해왔던 사상이던 관계속에서는 잠시 사라져도 좋다. 마음으로 대화하고 싶다면 말이다.


이 모든 생각은 옆에서 자고 있는 아들을 보는 순간 또 다른 걱정으로 밀려왔다. 내 아들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충분히 이런 생각을 가질만 하지 않을까.


나도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더라도 어느 날엔가 나이를 먹으면서 고정관념이 더욱 확고하게 되고 살아온 날들을 기반으로 나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 모든 도움을 주기 위해 나의 세상에서 배운 것들을 알려주고 싶어하겠지. 우리 부모님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의 방식이 너와의 불통을 야기한다면 단지 사랑한다는 반박하기 미안한 그 말로 너의 입을 닫게 하지 않을것이다.


정답을 주려고 하기보다
너의 말을 먼저 들어주고

너와 같은 위치로 가서 나의 생각을 전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친구처럼 나에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기에 편하지 않을까.


말이 길어졌지만,

다행이도 해답은 있을 것 같다.

아들을 위해서도, 내 주위 모든 다른이들을 위해서도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계속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 가르치는 입장보다 아들의 생각이 자라감에 따라 같이 묻고 같이 공유하는 범위내에서 답한다면 적어도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일방적인 대화는 아니지 않을까.
이 또한 네가 어떻게 원하는지 물어봐야겠다.

함께 커나가야겠다.


적어도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서로의 마음속에 왔다갔다 발을 담글 수 있게 우리 대화의 다리는 항상 장애물이 없어야겠다. 이런 시기를 겪으면서도 계속 내게 소통으로 생각을 나누자며 다가오는 나의 부모님처럼.


더불어 생각컨데,
사람은 배우지않으면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뒤쳐져간다고 한다.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맑은 눈을 가진 어린아이들에게도 배우기를 힘쓰며 살아가기를 나 자신에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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