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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Feb 19. 2020

그런 날

못 보던 나를 만나 뺨을 맞는 날

별거 없이 그냥 혼자서 길을 걷는 여유만 주어져도 나를 찾은 느낌인데, 나는 나를 너무 오랫동안 못 만난다. 너무 드물게 얼굴도 잊어버릴 만큼 오랜만에 이따금씩 만난다.


요새는 육퇴 후 고된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 그저 앉아서 빨래를 개며 보는 넷플릭스가 유일한 취미가 되었다 (나도 그렇게 아줌마의 모습으로 티브이를 보며 집안일을 하고).

자기 계발이니 운동이니 취미생활은 받쳐주지 않는 체력 덕에 단기간 프로젝트로 끝나버리곤 했는지라 그저 체력이나 능력이 딸리면 이 기간은 욕심부리지 말고 즐겨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에 있으면서 잠자코 은퇴 후 삶을 사는 것처럼 몸 편하게 쉬면 될 것을 집에 쉬고 있자면 꼭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감이 몰려온다.


독일에서 보다만 미스터 선샤인을 다시 정주행 했는데, 이게 하필 원하지 않는 삶을 살던 노비나 백정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그런지 어느 날은 유독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기가 먹다 남은 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내가 꼭 노비같이 느껴졌다. 노비 별거 없구나. 지금 나의 패턴이랑 많이 다를 게 없는 듯한데.


어느 날은 나의 귀여운 아들을 위해, 그래도 사랑하고 고마운 남편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는 게 의미 있다 싶다가도, 더러는 행복하다 싶다가도, 그렇게 아주 잘 지내다가도, 힘을 내서 재미있게 살다가도, 나라는 인간이 그리워질 때면 모든 욕심과 불만이 한 번에 몰려올 때가 있다.


친구들과 만나서 시계를 주시하지 않고 마음껏 놀아본 적이 언제인지, 노는 것은 사치라 쳐도, 밤거리를 나가 야경을 본적이 언제인지, 고무줄 살이 또 늘었다 치면 금방금방 식이요법이니 운동이니 몸매 관리를 해본 적은 어제였는지, 나를 위한 쇼핑은 언제 해봤는지,


쇼핑은 무슨 쇼핑, 어차피 애가 침 흘리고 밥 흘리고 토하면 갈아입어야 하는 옷, 어디 누구 만나러 나갈 일도 없고, 해서 그저 편한 옷만 사다 보니 트렌드가 뭔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살이 쪄서 꽉 끼는 전에 입던 레깅스를 입고 나가면 민망하게 보이는 그 실루엣을 아래위로 훑던 키즈카페의 한 여자의 시선부터 그냥 다 애처롭고 슬퍼지는 날이 있다.


외벌이로 전락하고, 그 와중에 이자니 원금이니 다 갚으면서 적금도 들고 있는 나를 보면 "그래, 역시 나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여자지"라고 뿌듯하다가 이내 외출할 때 듣도 보도 못한 룩으로 나돌아 다니는 내가 건물 유리로 비추어질 때, 그래서 집에 와서 좀 다시 꾸며봐야겠다 싶어도 그 옷이 그 옷일 때. 가끔은 잠시 뒤돌아있던 자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내 머리끄덩이를 낚아채서는 "네가 날 무시하고 살아왔잖아"라고 비수를 꽂는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출산과 육아는 하는 게 아니에요, (어느 정도) 당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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