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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May 14. 2020

청담동 26-5번지.

이상에서 현실로 추락하는 동안,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26-5번지.

현재는 웨딩 관련된 사업가가 운영하고 있는 듯한 언북초교 후문 바로 앞 카페 트리아농, 그곳은 바로 내가 살던 집이었다. 기억이 또렷해지는 유치원 졸업할 때 즈음부터 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의 추억이 묻어난 곳이며, 나의 현실이자 착각이 시작된 장소이다.


아버지가 젊어서부터 모든 열정을 바쳤던 회사를 나와 새로이 가게를 차려 장사를 한다고 모든 자금을 끌어모아 (구) 강남구청 근처에 가게를 내고, 소비를 최소화시키려고 그 안에 집을 만들어 이사시키는 바람에 우리는 정든 그 집을 떠나야 했다. 다음 집주인이 집을 구경하러 왔을 때 얼마나 미워 보였는지. 쿨하게 괜찮다며 오히려 엄마를 안심시키는 그 안에는 사실 그 집에 든 정을 떼지 못하는 청소년기 소녀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내가 기억하는 달리 청담동 한복판의 언북초등학교의 아이들은 그 당시 꽤나 순수했다. 1997년 일주일 용돈으로 5천 원을 받는 초등학생 5학년이 부자라며, 다른 학우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그런 소박한 아이들이다. 비록 명절에 용돈으로 얼마를 받았느니, 우리 집은 몇 평이니 그런 자랑을 했지만 그 또한 경제개념이 있어서 라기보다는 우리 아빠는 힘이 제일 쎄, 우리 엄마는 정말 이뻐의 다른 버전 중 하나일 뿐. 어느 방송국 국장의 아들도 실내화 주머니에서 용돈을 훔치고 짝꿍이었던 나에게 몰래 말하기도 했다.


한참 채팅이 유행할 때였다. 친한 친구 하나가 가파른 언북초교 근처 길을 걸으며 말했다.

"어디 사냐고 하길래 청담동 산다니까 막 우와 부자동네 사네? 그러더라?"

"그래? 동네가 부자면 부자래? 우리 동네도 거지 되게 많은데"


엄마는 한번 파지 줍던 한 할머니를 욕했다.

"왜~ 나이 드셔서 돈 벌라고 고생하시는데"

"진짜 없으신 분들이 그나마 가져가 팔아야 하는데 집도 두 채인 양반이 맨날 다 수거해가니까 그렇지!"


구정고(현 압구정고)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엄마가 수를 써서 보낸 삼성동 언주중학교에서는 보통 압구정보다는 삼성동 또는 대치동 쪽으로 배정이 되기에 전교에서 달랑 3명이 구정고로 배정되었는데, 하필 그중 한 명이 나였다. 아빠는 압구정 아이들은 정말 아빠 외제차를 끌고 나와 사고를 치고 즉 말하자면 막돼먹은 재벌이나 졸부 자녀들이 많기에 웬만하면 그런 속히 말하자면 날라리들을 피하라며 우려를 표하셨다.


하지만 막상 만난 고등학교의 친구들은 내 학생 시절의 제일 좋았던 고1의 3개월을 안겨준 정겹고 사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오히려 검소하고 순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도약하기 전 개구리의 모습일까, 아직 나비가 되지 않은 성충의 모습이었다. 청담동에 살 때는 몰랐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에도 느끼지 못했다. 차이는 부모님의 경제형편이 안 좋아지면서 소득계층이 밑으로 내려가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너와 나의 차이는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벌어졌다. 아빠가 늘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빠는 안 좋게 말하면 잔소리, 좋게 말하면 조언을 참 많이 해주셨는데, 그중 내가 떠올랐던 말은 각도기의 눈금 차이였다. 각도기의 눈금 차이는 시작점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이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벌어져서 100미터만 가도 양 끝이 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벌어진다며 어릴 때의 나의 좋은 습관 기르기를 강조하셨다.


내가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니 그 벌어진 각도가 보였다. 조언의 목적이었던 나의 습관의 차이가 아닌 나와 내 친구들의 재력의 배경이 벌려놓은 삶이었다. 그 벌어진 거대한 틈 사이에는 자격지심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고, 실제 간격 이외에도 그 굳건해진 자격지심이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희한하게도 풍족하게 살 때는 관심도 없던 명품이 자꾸만 가지고 싶어 졌다. 중고로라도 사고 싶어 졌다. 군대 가면 집에 황금송아지는 한 마리씩 있다는 그 허풍처럼 자꾸만 나의 Origin은 강남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어 졌다. 엄마의 낡은 차가 창피해졌다. 겉모습에 자꾸만 치중하게 되었고 허세가 날로 갈수록 늘어갔다. 아직 돈 한 푼 못 버는 학생이 루이뷔통 지갑은 왜 가지고 다녀야 하는지..


하필 또 세월이 지나도록 그 동네 친한 친구들은 망하는 녀석 하나도 없이 다들 잘되었다. 미국 간 놈들은 미국에서도 월가, 그 외국인 취업 어렵다는 미국에서 대기업에 근무하거나 변호사나 의사가 되고, 한국 녀석들은 사업을 물려받거나 그냥 심심찮게 대기업에 다니며 시집가면 압구정에 집을 얻어 애를 키운다. 심지어 지하방에 살던 김 아무개도 사업을 일으켰다. 하필 엄마의 친구도 살던 집을 리모델링해서 1,2층은 세를 받고 3층에서 살며 남편의 사업은 계속 번창한다.


내가 스스로 알고 있던 나의 높고 높았던 자존감, 자신감, 당당함은 환경과는 별개라고 생각했거니와, 어째 환경이 바뀌니 맥을 못 추고 비틀거렸다.


집이 기울고 나서 한동안은 내적 타격은 심하지 않았다. 아니면 충격이 깊이 침투하지 못했던 건지,, 아마도 해외로 나가서 현실을 도피한 덕에 크게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도 솔직하게 내곡동 어딘가 세를 얻어 산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돈돈돈 하는 독일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라며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거룩한 척도 했다. 하지만 내 미래와 열정은 사실 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나의 가장 부유해서 즐거운 기억은 26-5번지에 살던 때로 국한되기에 그 행복을 되찾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요건이 아닌, 꼭 그 집이어야 행복한 것처럼 느꼈다. 아버지가 장사를 하시면서 수익은 사실 꽤나 컸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도 한 달 순수익만 해도 그 당시 천 이상이었고 쌓인 돈도 억대였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이 돈이 없다고만 하셔서 경제상황 모르는 고등학생인 나는 이미 그때부터 우리 집은 힘들어진 집이었지만, 사실은 억을 주식에 투자고 유학을 보내고 등등을 해도 돈이 모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학을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형편이 맞으니까 보내셨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 악물고 유학을 떠나는 학생으로 착각했다. 엄마가 다시 한국으로 데리러 오셨을 때는 내가 생각했던 그 상황이 잔인하리만큼 현실이 되었다. 내 머릿속에 우리 집은 이미 가게를 차릴 때 기울었지만, 부모님의 현실 경제상황은 정말 내가 유학을 가고 나서 망했다. 내가 돌아올 때 즈음은 가족 통장에 잔고가 500이었다. 투자한 주식도 팔 수도 없는 똥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은 수중에 단 500만 원을 남긴 채 모든 것을 잃었었다.


하필이면 없을 때는 유혹에 더 쉽게 끌리는 법일까, 그렇게 신중하고 사람 못 믿는 아빠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세금을 환급해준다며 옆에서 듣기에도 사기 같은 그 전화 한 통에 1푼이 절박했던 아빠는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다 불러주고 말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도둑맞는 것을 나는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통장 잔고도 다 털려버렸다.


미국 대학에서 장학금을 확정받고 비행기만 타면 되는 상황에서 내 상황도 고꾸라졌다. 수능을 준비하려 했으나 하필이면 뉴질랜드에서 월반을 했기 때문에 12 년수가 다 채워지지 않아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증이 있어도 12년 햇수가 채워져야 인정이 되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내게도 다가왔다. 사실 수능도 어려웠다. 한국의 수준을 뉴질랜드에서 고작 6과목 공부한 내가 따라갈 수 있었을까, 내 한국에서의 삶은 어느 정도 정해진 듯 보였다. 부모님의 눈에도 고졸의 운명이 보였나 보다.


그렇게 아빠는 자신을 쥐어짜며 나를 유럽으로 보낼 계획을 하셨다. 그때까지도 내 철들지 못한 눈에는 아이비리그에서 활개 치는 친구들이, 셋방에서 몸도 마음도 찌들어가는 부모님보다 더 크고 가깝게 보였다. 그래서 무턱대고 아빠의 제안을 수락하며 독일로 유학길을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서 저 집을 다시 사서 꼭 저기서 다시 살아야지. 한국에 잠깐잠깐 돌아와서도 집착하듯 그 집을 꼭 한 번씩 들렀다.


나이가 서른이 다되어가자 로또가 되는 꿈을 꿔봤다. 현재는 로또 단독 1등이 되어도, 세금 떼고 나면 집 사고 끝날 청담동 시가였다. 그 돈을 주고 저 낡은 집을...? 고작 청담동에 살자고..? 이제는 커서 가보니 거리도, 집도 모든 게 작아진 나의 기억의 동네 속 그 집을 사기 위해..? 거기 사실은 별거 없는데. 내가 직접 한 가정을 꾸리고 한 가계의 재정을 담당하고 보니 내 집착에 대한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루었던 것도 아닌 과거의 영광에 그렇게 목을 매었는지 로또 꿈을 실컷 꾸다 보니 자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나서 살았던 동네도 아니다. 내가 못나서 고꾸라졌던 현실도 아니었다. 살다 보니 살아지고 현실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일 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는데 내 마음이 혼자 구깃구깃했던 것 같았다.


갑자기 영화에서 본 대목 하나가 떠올랐다.

"Fear isn't real." 나의 구겨진 마음은 현실이 아니었다. 반대로 "Pride" 또한 현실이 아니었다. 어떠한 사실을 기반으로 내가 두려워할 수도, 내가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는 게  한 사람의 현실이었다. 마음가짐에 따라 사실이 현실 반영된다. 삶이란 집을 몇 채씩 가지고도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매일 마음이 찌그러질 수도 있고, 고작 몇 푼 벌면서도 나의 성실함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도 있었다.


가끔은 케케묵은 마음의 병도 허상에 의해 깨어질 수 있다. 로또를 꿈꾸다 터져버린 나의 유레카처럼.


그렇게 티 나지는 않았지만 잔잔하게, 엉뚱하게도 로또를 꿈꾸며 허상으로라도 목표를 이루고 보니, 굳게 내 마음에 자리 잡혀있던 나의 자격지심은 이렇게 끝이 나고, 나는 등에 내 날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부터 공중에 떠 있지 않았다.


"지금부터 날아오르는 건 오롯이 내 차지야. 높이 날지 않아도 좋아, 원래 좋은 공기는 밑으로 가라앉거든. 오히려 높이도 날아보고 낮게도 걸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나는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라고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사업가 자녀도 만나보고 아직 약간은 철이 덜 든 땅부자의 자녀들도 만나보면 그들 또한 전에 내가 그랬던 대로, 내것은 아니지만 내가 누리고 있는 부모에게 빌린 삶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등에 업은 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양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나쁜 버릇을 가진 사람, 물론 그에 합당하는 자격이 있게 잘 자란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모두의 환경을 제한다면, 그리고 정말 자수성가 한 존경할만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부러워하는 그들 중에는 나와 별반 다를 것도 없고 아니 오히려 나보다 능력이 못 미치는 사람도 많았다. 환경 덕에 교육이 잘돼서 칭찬할 만한 사람들도 물론 많고. 하지만 더 이상 부럽거나 하지 않다.       


내가 자존감이 충만했을 때 했던 생각이었다, 환경과 나는 별개이다. 모순되게도 환경 따라 날아가버린 자존감을 되찾으며 이 현실 또한 바로 보게 되고 나니,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청담동에 집착했는지 갑자기 웃음이 피식 나온다.  






편안한 마음으로 현재의 삶에 충실히 살고 있다.


고맙게도 다른 모든 주변 주택들은 재건축 이후에 그 전의 모습은 다 벗어버린 빌라들이 되어버렸지만, 우리 집이었던 주택만은 카페 리모델링으로, 감사하게 집안 내부까지 다시금 추억할 수 있게끔 공개되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너무 쉽게 바뀌는 한국에서 홀로 과거가 살아남았다. 


매번 열쇠를 아침에 잊어버리고 안 들고나가던 초등학생이 넘나들던 대문과 담벼락은 부서지고, 키우던 많은 반려견들이 자랐던 마당은 그 형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좋아하던 나무는 잘렸지만 그래도 마당에서 나의 추억을 상기하기에는 충분하기에 이만으로도 만족한다.

언제 한번 들를게요, 카페 트리아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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