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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Feb 12. 2020

희망이 나를 움직이게 해

2012년, 만하임 경영대

2012년도 역시 우울하기는 같았다. 그저 그 우울하고 침침한 삶이 익숙해졌을 뿐. 놀랍게도 사진들을 살펴보면 밝은 태양 아래 테닝을 하고 있는 사진, 잠시 방문한 친구나 가족과 밝게 웃으며 찍은 사진, 한 껏 멋 낸 사진들이 있음에도 나의 기본은 우울해서였을까 나의 기억은 온통 책상에 앉아 찾아지지 않은 삶의 길을 헤매는 모습뿐이다. 내 기억에서 이 정도로 지워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밝은 기억들은 삭제되었다. 그나마 사진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2012년 내내 집안에 처박혀 있었다고 기억했을 것이다.

New York Street

2011년 마지막 통역 알바를 해서 벌었던 돈으로 미국행 티켓을 무작정 샀었다. 12월 24일 LA행 비행기, 12월 31일 뉴욕행, 그리고 내 생일날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그냥 한번 가보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곳, 성향은 나와 확실히 더 비슷한 듯한 미국인들, 독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가식적이나마 친절한 사람들. LA와 뉴욕을 돌아오고 싶지 않던 독일로 다시 돌아왔다.  비행기가 독일 국경을 지나 점점 고도를 낮출 때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낮은 기압, 회색 하늘 덕에 독일에서는 두통이 많았다. 너무 오기 싫었던 것일까, 무거운 짐가방을 혼자 끌고 오는 길이 생생히 기억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처음 맞이한 독일 집 천장이 너무 낯설고 싫었다.


2012년은 그렇게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서 멍 하기를 여러 번, 내 인생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유럽에서 살아남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다시 한국땅을 밟을 것 같았다. 하긴, 나는 유학을 왔으니 유학이 끝나면 돌아가겠지. 누구는 유럽에 오고 싶어서 100만 원은 훌쩍 넘는 비행기 값을 내고, 숙박비를 내고, 유럽여행을 하는데 나는 유럽 한가운데 앉아서 이게 뭐람?


뉴질랜드에서도 그랬다. 오히려 사는 동네는 여행을 안 다니는 것처럼 유학기간에도 딱히 이곳저곳 돌아다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뉴질랜드에서 돌아왔을 때 꽤나 후회가 됐던 것이 생각났다. 그 유명한 퀸스타운도 안가보고, 많이 즐기지 않고 바보같이 살았었다.


에라, 여행이나 다녀야겠다.



몇 달간 생활비를 아껴 모인 돈으로 주변 국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딱히 가고 싶은 곳도,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하듯 런던, 벨기에, 베니스 비행기 표를 끊었다. 독일에서 미술 지망생일 적 만난 친한 언니 한 명이 있었다. 뒤쎌도르프에 살고 있었지만, 마치 연애라도 하듯 매일같이 몇 시간씩 통화하는 바람에 나의 소울메이트였다. 언니와 함께 여행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니 따라 놀러 간 런던의 한 시장

나의 여행 방식은 내 삶만큼 자유롭고 느긋했으며 다른 말로는 목표 없고 계획 없었다. 그저 원하는 목적지로 가서 그때부터 정보탐색과 거리배회가 시작된다. 좋은 점은 느린 걸음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하는 여행에는 여유롭게 내가 사는 도시처럼 도시를 훑어보는 경험이 있음이고, 또 남들은 모르는 현지인들만의 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안 좋은 점은, 유명한 곳들을 많이 놓치고 여행기간이 짧을 때에는 사실 시간낭비가 심하다.

그래도 개버릇 남 못주는지 비행기표를 사고도 출발 전까지 아무 계획을 안 짰다. 그리고 함께하는 여행에는 아무래도 무계획이 계획을 따라다니게 되어있다. 언니의 플랜대로 그저 졸졸졸 따라다녔다.


벨기에 겐트

홍대 미술과를 나온 언니라 그런지 박물관이나 예쁜 디자인이 즐비하는 장소로 많이 돌아다녔다. 어차피 유명한 장소나 박물관등은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곳이면 모르겠으나, 그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이유는 내게 여행지로 뽑힐만한 이유가 못되었다. 지나다니며 기분이 좋고,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벨기에 여행도 그랬다. 기차를 타고 겐트, 브루겔로 향했다. 벨기에 기차에 탄다는 것, 밑에서 올려다보는 어느 건물의 천장에 보이는 고급진 예술 조각, 또는 허름한 나무 천장도 정겨웠다. 대학생들이 앉아 여유를 부리는 강가에서 앉아서 광합성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에 얼마나 열정이 없었나 싶기도 하다. 누구는 여유로운 성격, 자유로운 생활방식이라 했지만 나를 관찰해본 내 입장에서는 여러 번의 좌절로 인해 삶의 기운이 사라진 듯 느껴진다.

그림 같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 베니스

하지만 여행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길고 긴 어둠이 지겨웠던 것일까, 미세하게 남아있던 희망의 마지막 자락이었을까, 작년에 베니스에서 만났던 월가에서 근무하던 지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사람도 수학과를 처음 선택해서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갔다가 한 학기를 하고 바로 경영으로 전환했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월가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여행기간 동안 열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맞아. 나도 수학과는 어차피 나와는 맞는 것 같지 않았다. 수학과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기본으로 배웠는데, 학문을 제쳐놓고서라도 이 부분이 나를 꽤나 괴롭혔다. 간단한 Maple, Matlab, C+, eclipse 정도였지만 일단 시간적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고,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3년 내내 과제를 완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너와 맞지 않아. 나는 차라리 경영이 더 잘 맞지!  


그렇게 경영대학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독일은 몇몇 종합대학이 유명하기보다는 어느 대학의 어느 과가 유명한 경우가 많다. 한국처럼 스카이 등 몇몇 종합대학을 갑으로 치는 것과는 달리 예를 들어 아헨 공대, 뮌헨 공대, 하이델베르크 의대같이 경영대는 만하임이었다. 여느 독일의 대학과 같이 독일은 입학 전에 학교를 보여주거나 입시상담을 개인적으로나 단체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 입시에 큰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학교를 소개하는 역할이다. 경영으로 마음을 바꾼 후 노려본 만하임대학은 방문 당시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만하임은 외관으로도 아름다운 성을 학교로 쓰고 있기에 가운데 건물만 박물관이고 나머지는 다 대학시설이다. 어쩌면 둘러있는 성벽 위에 황금장 식이 나를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지원서를 제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독일에서도 경영학과는 꽤나 들어가기 힘든 과이다. 게다가 본인의 특성이나 흥미를 잘 살려 대학에 진입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경영학과는 보통 사업자의 자녀들이나 경영, 경제 부분에 특출 난 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합격한 만하임 경영대에서는 말이다.

사촌동생 갑자기 분위기 이사

2012년 여름. 한 통의 무거운 서류가 우체통에 꽃혀있었다. 만하임 대학에서 날아온 서류들이었다. 경영학과에 입학했다는 문서였고 그 서류를 쥐고 오랫만에 독일에서 찌운 살들과 함께 지상 30센치정도 점프를 했던 한 날이있었다.  맞다! 외국인 특혜와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살았던 경험, 수학과에 재학 중이었다는 가산점을 받아 독일에서 경영으로는 1위였던 만하임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나 만하임대학 합격했써어어어어어!!!!!!!!!! 마침 여행 와있었던 사촌동생과 함께 바로 이사 준비를 하였다.


특히나 만하임 대학의 황금으로 된 담벼락 위 장식이 나의 마음을 더욱더 사로잡았기에 좋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만하임 대학교! 바닥에 갇힌 나를 저 위에서, 중간도 아닌 저 하늘쯤 되는 곳에서 끌어당겨주는 기분이었다.

 



일반 독일 대학의 입학은 10월이었지만 만하임은 9월이었다. 입학통지서에 사인을 해서 보내고 바로 스투트가르트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는 바로 이사를 준비하였다. 사촌동생은 어쩜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냐 했지만 그저 만하임으로 내달릴 뿐, 나의 많은 우울함을 가지고 있는 스투트가르트에는 더 이상의 미련도 없었다.


Tschüss, Stuttgart! [바이, 스투트가르트]


배경 사진 출처: https://reg.ubivent.com/register/uni-ma-b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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