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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Dec 28. 2019

2011년, 아프다.

독일이 날 아프게만 하는 것 같아

2011년 독일 만 23살, 한국에서는 아마 한창 대학로에서 교우들과 수다를 떨거나,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며 사회활동이라도 하던가,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하나하나 떼어나갔을지도 모르는 그런 나이에 나는 홀로 갇힌 어두움에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뉴질랜드 리카톤 고등학교 친구의 홈파티

사실 뉴질랜드에서 영어를 배우자고 친구를 사귀려 부단히도 애썼다. 한국에서는 그저 마음 맞는 친구를 골라 사귀면 될 것은, 해외에서 영어를 배우고자, 외로움을 이기고자 남에게 맞추고 아량까지 떨어가며 친해지기를 갈망했다. 이미 나보다 5년 먼저 유학 왔던 고등학교 선배 하나가 영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절대 한국인과는 섞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기에 아마도 더 힘들고 외로웠을 수도 있다.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 노력이 스스로에게 꽤나 지쳤었는지 독일에 와서까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현지인들에게 나를 끼워맟춰주는 그 짓이 하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한국인들과 섞여서 독일어도 더듬더듬, 지나가는 어느 무리지은 외국인처럼 살기도 싫었다.


오롯이 혼자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학교에서 헤매고 있는 와중에 마음까지 무너져버릴 일이 생겼다.


당시 사귀었던 열망이 강했던 남자 친구와는 한국에서 돌아와서 서로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자고 제안했다. 서로의 시간이 아깝다는 말에 그는 흔쾌히 동의했지만 하지만 그 남자는 마치 그저 다중연애를 허락받은 것처럼 나와는 계속 사귀는 듯 연락하고, 만나서 식사하자며 날 챙기고, 심지어는 본인이 힘들 때 와달라며 부탁도 하며 끝난 연애를 질질 끌어댔다. 핑계는 서로의 미래였으나 원래 헤어질 생각이 있던지라 딱히 정이 더 생기지는 않았었지만, 그의 다른 여자들을 알고 나서는 감히 내가 농락당했다는 자존심의 추락과 배신감, 그리고 휘몰아치는 분노에 오히려 그 사람은 집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내가 제일 먼저 그의 세컨드 여자인 DAAD장학재단에서 만난 여자와, 그리고 써드인 스투트가르트 음대에서 만난 여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어 제일 먼저 똥을 피할 기회는 주어졌으나 (아마 나머지 두 분은 아직도 모를 듯하다), 그 분노는 이후에도 한동안 나를 휘감아 태워댔다. 총이 손에 있다면 찾아가서 얼굴이고 하체고 신나게 쏴주고 싶었다. 그의 피가 많이, 멀리 튀면 튈수록 속은 시원할 것만 같았다. 생명은 살려두고 병신만 만들고 싶다는 잔인하고 어두운 생각이 나를 감쌌다. 아직도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그의 세컨드녀, 한국에 남자 친구도 있는 상태에서 그를 만나 서로 바람난 상대와 결혼을 했으니, 그냥 평생을 지금과 같이 변하지 말고 살라는 마음의 저주를 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기댈 곳도 없는 상황에 온 엎친데 덮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신체에 변화를 가지고 왔다. 엄청난 우울감은 무력감을, 무력감은 심장박동수를 늦추었고, 갑상선 저하증에 의한 피로와 덤으로 그동안 여드름 한번 나지 않았던 피부를 곰보처럼 뒤집어 놓았다. 뒤집어진 얼굴에 거울을 볼 때마다 더 우울해졌고 무력감은 날로 더해져 한날은 학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Teufelskreis 악마의 원이라는 직역인데, 악순환을 뜻하는 독일 단어이다. 일에서 악마의 원을 몸소 경험해보는 기간이었다.


건강을 핑계로 독일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수업을 따라가기 마음에 이미 겁을 잔뜩 먹고 있는지라,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시작되었다 싶으면 목 뒤부터 뻐근해지면서 혈압이 올라 어지러웠다. 내 혈압은 저혈압이 심해져 심장이 뛰게 도와주는 약도 처방받았는데 증상은 고혈압 같은, 딱히 병명이 정해져 있지 않은 스트레스성 발병이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오른쪽 등부분에 마비가 시작되어 남자 힘으로 세게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MRI까지 찍어보았지만 원인불명이었다. 밤마다 이를 갈아대서 그런지 턱관절 장애도 함께 왔다.  


이미 한번 올랐던 유학 경험에, 유학길에 오르면 발 디딜 부모라는 땅이 없어서인지, 충격을 피해 가기는커녕 너무 정면으로 흡수해버리는 나를 알기에, 이 쇼크는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더 슬픈 쇼크였다. 아직은 받아칠 만큼 강해지지 못한 나였다.


휴학을 하고 나머지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독일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그들과 같이 공부해야 제일 효과적이었으나, 나는 같이 토론할 정도의 언어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또 한 번 악순환이었다. 독일 교수도 다른 독일 친구들처럼 같이 공부하는 방법을 모색해보라고 추천하였으나, 생활 독일어와 겨우 익힌 TEST DAF수준의 외국인 독일어는 같은 레벨에서 그들과 정답을 찾아가기에는 매번 목 뒤가 뻐근해져 왔다. 차라리 더 편한 영어 강의를 찾아 MIT 공대 홈페이지에 무료로 올라오는 선형대수 수업을 들으며 진도를 따라갔다. 개인적으로는 제3 외국어보다는 제2 외국어로 듣는 MIT 수업이 훨씬 쉽게 이해가 가고 쉬웠다. 대수학은 졸업한 지 6년이 다되어가는 나를 고등학교 과정부터 다시 공부하게끔 만들었다.


선형대수 수업

어느 정도 개념이 정리가 되고 수학은 상상력이 무궁무진하게 필요한 학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정해진 답이 아닌, 내가 증명해내야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과감하게 시험을 봤다. (휴학기 중에도 시험을 볼 수 있어요.) 성적은 형편없었다. 게 중 내가 내 생각으로 증명해낸 명제들이 점수를 받은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제때 졸업도 못하려니와 졸업을 하다가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전공인 경영학이 점점 더 재미있고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직히, 한참 멋을 내는 나이었다. 내 친구로 사귀는 사람은 적어도 나와 비슷한 성향이기를 바랐는데 스투트가르트 수학과에서 날개를 펼치는 녀석들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곱슬머리와 곱슬 수염을 턱까지 기르고,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 아니면 초등학교 때나 입던 옷들을 입고서는 화장한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녀석들이었다. 꾸미고 가면 가는 만큼 이상하게 쳐다봐주었다. 그 시선 덕에 수학과에 대한 나의 마음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아직은 세상을 외모로 보는 나이었다. 구질구질한 독일과 나는 정말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날씨도 하필 구질구질했다. 밝은 날 조차 우울하고 싫었다. 나의 밝고 상쾌함(극히 주관적시점)과는 너무 거리가 먼 독일이었다.


그나마 엄마의 지대한 마당발에 알게 된 어느 분의 연락으로 통역 알바를 추천받아하게 되었다. 하루에 200유로의 현찰은 유학생에게 시험이니 공부니 다 뒤로 젖혀버리는 너무 유혹적인 금액이었기에, 덥석 물어버렸다. 4-5일간을 두 번,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나 색다른 경험도 하고, 다행히 나를 좋게 봐주신 덕에 소개해준 분께 좋은 이미지를 쌓아 앞으로의 용돈 벌 기회가 늘어났다. 그나마 2011 우울한 한 해에 두 번이나 좋은 기억을 남길 수 있었다. 아마도 365일 중 단 며칠간의 통역 알바가 2011년에 제일 행복했던 이유는, 내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의 확신과, 사회적인 욕구가 만족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웃자, 어두운 밤 지나고 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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